때에 맞춰 심고 또 심을 뿐. 우리의 일은 결국 다 심는 일.”
섬진강 들녘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보내며
생생히 기록한 김탁환의 제철 마음
하염없이 걷고 원 없이 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던 27년 차 소설가 김탁환. 어느덧 작가로서 새로운 10년을 계획해야 할 시기에, 그는 익숙한 글감에 젖어 늙어가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다가가서 살피고 사귀며 글을 쓰고자 결심한다. 이를 위해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의 이동현 대표와 동행을 그려냈던 전작『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서 맺은 인연으로 곡성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서울을 미련 없이 떠났다. 섬진강 옆 집필실에서 초보 마을소설가이자 초보 농부로 글농사와 함께 논농사를 짓고 텃밭도 가꾸고 있다.
그 첫해의 사계절을 겪으며 서툴지만 한 걸음씩 디딘 마음들을 신작 산문집『김탁환의 섬진강 일기』에 생생히 담았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강과 들녘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생각하며 기록한 일상들과《농민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엮었다.
이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가가 마주한 자연의 풍경과 그때 먹은 마음과 해야 할 일을 ‘인디언 달력’처럼 구성한다. 농부로서의 고군분투는 물론 창작을 향한 소설가의 치열한 삶도 밀도 있게 담고 있다. 작가는 시금치를 솎으며 단어와 단어 사이의 적정한 거리를 생각하고, 못줄에 맞춰 모내기를 하며 논바닥에 글을 쓰는 듯한 기분으로 자신의 문장을 돌아본다.
야외를 쏘다니며 나물과 독초를 구분하지 못한 순간에 정확하게 알고 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길 위에서 뜻밖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순환을 떠올린다. 열여섯 살 노견, 복실이의 느릿느릿한 걸음을 보며 천천히 가족과 함께 늙어가는 행복을 생각한다.
섬진강가로 내려온 후, 작가는 손을 쓰고 발로 걸으며 생긴 몸의 변화가 생각으로 이어져, 새로운 일에 대한 시작을 다짐한다. 미실란을 플랫폼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나간다. 생태 워크숍부터 이야기 학교까지 마을주민을 위한 강의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며 마을살이를 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잊지 않는다. 또한 15년 넘게 아끼며 읽어온 책들을 골라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고, 책방지기로서 첫발도 디딘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일을 하더라도 그 중심은 소설 집필이다. 일기 곳곳에 작가로서 풀리지 않는 구절들을 두고 물러서지 않는 치열함이 배어 있다.
그 성실함의 결과물이기도 한 이 책은 시, 수필, 판소리 등 다양하게 변주한 리듬이 살아 있고, 맑은 물맛과 진한 흙내를 머금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더불어 베짱이도서관 박소영 관장이 그린 색연필화는 온기와 생명력을 더한다.
자연의 여유와 사람들의 따뜻함이 스며든 작가의 하루하루를 함께 산책하듯 따라가다 보면, 도시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느라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풀고, 묻어만 두었던 일을 떠올리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섬진강 들녘에서 자연의 대순환에 맞추어 마음 먹은 일을 꾸준히 심고 또 심으며 살아가는 작가는,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고 시작하라고 다정한 응원을 보낼 것이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
그 계절에 맞는 마음을 살피는 일
들녘에서 한 해를 보냈다.
하나하나 만나고 사귈 때마다 잊지 않으려 기록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집필실에서 쓴 소설보다 두세 배 많은 글을 들녘을 걷거나 강가에 서서 끼적였다.『김탁환의 섬진강 일기』역시 그렇게 얻은 기록이다.
초보의 실수담들이 한 해 만에 사라질 리 없다. 습작 시절을 지나 장편 작가로 이번 생을 살겠다고 결심하기까지 10년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농사도 책방도 마을살이도 섬진강과 들녘의 일부로 사는 것도 역시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야 시작했으니 늦었다는 사람도 있겠고 이제라도 시작했으니 꾸준히 해보라 격려하는 사람도 있겠다. 나는 올해도 늦지 않게 제철 농사를 짓고 싶고, 그러려면 자연의 흐름을 살펴 제철 마음으로 꾸준히 일해야 한다.
귀향 첫해, 맑은 물맛과 진한 흙내를 내 문장으로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출처] 교보문고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