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정호승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을지로입구역 롯데백화점으로 올라가는 지하계단 옆
몇명의 사내가 라면박스로 정성껏 집을 짓는다
땅속에 파는 관 자리처럼
한 사람이 누우면 꽉 들어찰 크기로 모서리를 맞추고
하루에 한번씩 하관하는 연습을 한다
지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새들처럼 지붕을 짓지 않는
낡은 종이의 집에 하관하듯 들어가 사내들이 잠이 들면
슬며시 사내들의 그림자가 일어난다
먹다 남긴 김밥 몇 토막과
쓰러진 술병에 조금 남은 소주 몇모금을 마시고 집을 나선다
거리엔 축복인 양 눈이 내린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진다
비 오는 날 소의 등에 비닐을 씌우고 논갈이를 하던 아버지와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주던 어머니와
첫아이를 낳다 죽은 이야기를 하며
노숙의 그림자들은 밤새도록 눈길을 걷다가
그만 지하도 종이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사람이 되어 서서 잠이 든다
[출처]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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