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나를 위한 삶을 산다는 것! 강준만 교수가 통찰과 성찰로 쓴 인문 에세이 『평온의 기술』. 희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할 수 있는 노력이 바로 소확행, 욜로, 휘게 등 최근 등장한 삶의 방식들이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을 향한 사람들의 욕구가 점점 커지면서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을 충족시켜줄 방정식을 찾아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자기 자신을 지키고 나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평온이라고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보완하는 일에 매달리지만 낮고 작은 목표를 세워 성공의 경험을 만끽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최선의 선택이 아닌 그만하면 괜찮은 선택을 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약점을 공개하는 데 겁을 먹을 정도로 애쓰지 않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는 삶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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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믈리에 한마디!
저자소개
저자 : 강준만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 ‘증오 상업주의’와 ‘갑과 을의 나라’를 화두로 던졌고, 2014년에 ‘싸가지 없는 진보’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2015년에 청년들에게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는 ‘청년 정치론’을 역설했고, 2016년에는 정쟁(政爭)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가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일침을 가했고, 2017년에는 신뢰받는 언론인인 손석희의 저널리즘을 분석하며 한국 사회의 이슈를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사회 지식 프라임』, 『넛지 사용법』, 『감정 동물』, 『자기계발과 PR의 선구자들』, 『약탈 정치』(공저), 『소통의 무기』,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힐러리 클린턴』, 『생각과 착각』, 『도널드 트럼프』,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공저), 『미디어 숲에서 나를 돌아보다』(공저),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흥행의 천재 바넘』,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독선 사회』,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생각의 문법』, 『인문학은 언어에서 태어났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교양영어사전』(전2권),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외 다수가 있다.
목차
제1장 _ 평온한 삶을 위하여
욜로, 휘게, 소확행, 카르페디엠 … 19
강물에 떠가는 한 점 이파리 … 28
나의 정신적인 재고 조사 … 36
“다신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을래” … 43
「인빅터스」와 <아모르파티> … 51
평온한 척하면 평온해진다 … 59
제2장 상처받지 않을 자유
솔직을 빙자한 무례 … 69
내숭 떠는 게 뭐가 어때서? … 76
‘민감’을 탄압하는 사회 … 85
남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 94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 … 101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 … 108
제3장 확신은 잔인하다
싫은 사람을 긍정하는 법 … 119
웃으면서 화내는 법 … 127
거절을 평온하게 하는 법 … 136
나를 위해 용서하는 법 … 145
하룻밤 자면서 생각하는 법 … 150
‘독창성 강박’에서 해방되는 법 … 156
제4장 나로 살기 위한 연습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욕하는 대신 … 165
‘행운’을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극 … 174
‘스트레스에 강하다’고 뽐내는 사회 … 182
왜 우리는 서로 못살게 구는 걸까? … 189
모든 조직의 기본 모델은 조폭이다 … 196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 202
제5장 ‘자기 합리화’가 나쁜가?
‘성공’의 다른 이름은 ‘고통’이다 … 211
자신의 ‘능력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 217
목표 없이 사는 삶의 축복 … 223
목표는 작을수록 좋다 … 228
늘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가? … 233
‘나 아닌 나’로 사는 게 좋은가? … 239
제6장 포기하지 않는 게 의지박약이다
포기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 247
누가 “도전은 아름답다”고 했는가? … 254
당신은 결코 예외가 아니다 … 261
왜 돈 벌었다는 사람들 이야기만 들리지? … 268
“그간 이걸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 275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 281
주 … 288
책 속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열풍은 크게는 약자를 탄압하고 착취하는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이지만, 작게는 바로 그런 풍토가 조성해온 ‘둔감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일지라도 일상적 삶에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소지가 다분한 언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주변에서 “예민해졌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말을 들을까봐 침묵하는 남자도 많다. 교수의 성추행에 저항하지 못했던 어느 여학생은 졸업 후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제가 너무 유난이고 예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제2장 상처받지 않을 자유」(본문 90쪽)
지방에 사는 축복 중의 하나는 시공간적 여유다. 나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과 서울 인근 도시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까지 볼 정도로 그런 여유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나는 매일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닌다. 중간에 덕진 공원이 있다. 왕복 1시간 거리지만, 가끔 그곳에서 늑장도 피우면서 산책의 기쁨을 만끽한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걷기인지라 엄밀한 의미의 산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산책의 느낌과 기분으로 걸으니 산책과 다를 바 없다. 미완성의 주제에 대해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멈춰 서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종이에 메모를 한다. 「제3장 확신은 잔인하다」(본문 154쪽)
행운 요소는 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겸손해야 할 이유다. 성공을 열망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자학을 해선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행운’을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극이 천연덕스럽게 지속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법적 질서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부동산 투기나 투자로 번 돈을 불로소득으로 간주해 많은 세금을 물리는 법을 제대로 만들어 시행했다면, 현재의 불평등 양극화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큰소리치는 건 스스로 양심과 도덕을 무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제4장 나로 살기 위한 연습」(본문 180쪽)
단골집이 아닌 음식점에 갔을 때 메뉴가 너무 많으면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고, 그 느낌은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메뉴 많은 걸로 특화한 음식점이 아니라면, 되건 안 되건 전공을 내세워 한두 가지 메뉴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어떤 메뉴에도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망정, 잡다한 메뉴를 유지시켜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게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시간에 어느 하나라도 작은 비교 우위나마 가질 수 있도록 애써보는 게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맛없는 음식을 겨우 먹고 나서 이런 말을 음식점 주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내가 백종원도 아닌데 내 말이 먹히겠어?”라는 생각에 차마 말을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제5장 ‘자기 합리화’가 나쁜가?」(본문 222쪽)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듣기엔 아름답지만, 이런 말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처럼 이른바 ‘패자부활전’이 없는 나라에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믿지 않는 게 좋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율을 기록하는 것도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구조’ 탓이 크다. 그래서 소심해져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신중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열병을 앓는 순간 평온과는 영영 작별을 고하게 된다는 것도 감안하는 게 좋겠다. 「제6장 포기하지 않는 게 의지박약이다」(본문 274쪽)
출판사 서평
『싸가지 없는 진보』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낳은
강준만 교수가 통찰과 성찰로 꾹꾹 눌러쓴 인문 에세이!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한 인문 에세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연습”
최근 등장한 소확행, 욜로, 휘게 등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면서 희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최소한 할 수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소확행이 커피나 디저트 시장 등 외식업계 트렌트로만 그쳐 마케팅 전략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과 비판이 적지 않지만, 확실히 ‘나 자... 더보기
『싸가지 없는 진보』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낳은
강준만 교수가 통찰과 성찰로 꾹꾹 눌러쓴 인문 에세이!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한 인문 에세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연습”
최근 등장한 소확행, 욜로, 휘게 등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면서 희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최소한 할 수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소확행이 커피나 디저트 시장 등 외식업계 트렌트로만 그쳐 마케팅 전략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과 비판이 적지 않지만, 확실히 ‘나 자신을 위한 삶’을 향한 사람들의 욕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물질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기존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work and life)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고.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창한 삶의 목표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하거나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자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사회에서 계층 혹은 계급 상승을 위한 욕망을 키우기보다는 작은 일상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다.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을 충족시켜줄 방정식을 찾는 것이다.
평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삶 혹은 나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갖거나 누리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는 삶을 진정 ‘나를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한 삶’이다.
물론 사람들은 내심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데 뭘”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를 위한 삶’보다 ‘남을 위한 삶’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로 살기 위한 연습
지식인들이나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앞다퉈 ‘고통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강조하면서 “고통을 즐겨라”라고 말한다. 고통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고통을 그렇게 미화해도 괜찮은 걸까? 고통은 끔찍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불안과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게 적당한 수준이 아닐까? 성공에 대한 욕망은 우리 내면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욕망이 크고 경쟁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면에 더 강한 불안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과시해 보임으로써 내면의 콤플렉스를 상쇄하려고 든다. 그러나 성공을 위한 행위와 성공으로 얻는 평판은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어쩌면 성공의 다른 이름은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워런 버핏은 “능력의 범위를 알고, 그 안에 머물러라. 범위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범위의 경계를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넓혀나가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보완하는 일에 매달린다. 물론 세상이 워낙 급변하는 탓에 한 가지 강점이나 장점만으로는 불안해서 다른 능력도 키워두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의 범위를 무시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능력이 탁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목표는 낮고 작을수록 좋다. “명확한 목표만 있다면 삶의 가속 페달을 밝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어쩌면 “도달하기 힘든 목표는 불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비결”일 수 있다. 반대로 낮고 작은 목표를 세워야 성공의 경험을 만끽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목표가 크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목표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야 자기 효능감도 높아진다. 또 완벽주의도 사람을 힘들게 한다.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택’, 즉 ‘그만하면 괜찮은’ 선택을 하는 것도 좋다. 사실 완벽주의는 자만이나 오만에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자신은 충족시킬 수 있으며 충족시켜야 한다고 자신을 못살게 구는 건 그 바탕에 남들을 낮춰 보거나 무시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너드 코헨은 “뭐든 틈이 있어요. 그래야 빛이 들어오죠”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상처받지 않을 자유
우리는 일상에서 “너는 매사에 어쩜 그렇게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아예 욕이나 다를 바 없다. 전체 인구의 20퍼센트가량이 민감한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극소수자나 되는 것처럼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간다. 급기야 이들은 ‘루저’로 취급받기까지 한다. 미투(#MeToo) 열풍도 그런 풍토가 조성해온 ‘둔감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민감해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과 둔감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전자를 향해서만 둔감해지라고 권하는 걸까? 후자에게 민감해지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전두환의 5공 정권 치하에서 필화 사건으로 극심한 고문을 받았던 소설가 한수산은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도저히 이런 나라에서 살기도 힘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후일 한수산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들을 용서했다”고 고백했다. 한수산의 용서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용서다.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겠지만, 어쩌면 진정한 용서는 판타지일 수 있다. 우리에게 가능한 용서는 ‘남을 위한 이타적 용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이기적 용서’다.
우리는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약점은 감추려고 애쓴다고 해서 감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약점을 공개하는 데 겁을 먹을 정도로 애쓰지 않는 게 좋다. 자신의 약점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대표적 인물이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다. 그는 “흑인이었다. 사생아였다. 가난했다. 뚱뚱했다. 미혼모였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라고 자신의 약점을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약점에 신경 쓰는 세상을 비웃었다. 물론 자신이 감추고 싶은 약점이 공개된다면 평온이 깨지겠지만, 그것이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낫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기
‘나 아닌 나’로 사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좋지도 않다. 스스로 변화를 택한 사람은 강요당한 변화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많이 변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를 위한 삶이 없는 것이다. 변화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찾아온다. 자기 내면의 힘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 변화를 위한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그 변화의 폭과 정도가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다 포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대통령도 포기하고, 재벌 총수도 포기한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이 성공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많은가? 그런데 우리는 포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갖는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맹목적인 도전 예찬론은 무책임한 사기극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포기가 큰 도덕적 흠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포기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포기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암묵적 음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포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수를 들러리로 세워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기존 시스템은 무너지게 되어 있지만, 우선 나 자신의 평온을 위해 포기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얼마든지 ‘포기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감당하며, 구할 수 없는 것은 품위 있게 포기할 줄 아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 축복 있으라”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아니 나는 평온한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뜯어봄으로써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도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온의 축복을 누리자. 마광수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지극히 가벼운 것에서부터 온다.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져내릴 때 우리는 행복하고, 향기로운 커피의 냄새를 음미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뚱아리를 샤워의 물줄기로 시원하게 씻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고 자유를 느끼는 삶이면 족하다. 그것이 ‘나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