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탄생
나무의 일생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오래 활동하는 것이 뿌리이다. 뿌리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깨어나고 가을날 가장 늦게 정지한다. 지상의 눈들이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에도 가장 섬세하고 부드러운 뿌리털이 차가운 땅을 헤집고 시린 물을 빨아들여 지상으로 옮겨준다. 새잎이 피어났다고 해서 나무가 깨어났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뿌리는 가을잎이 져버린 뒤에도 혼자 남아 한 해를 마감하는 결산 작업을 한다. 뿌리들의 애처로운 노동으로 물이 모아지면 메말랐던 줄기는 부풀어 오르고 윤이 난다…(봄, 물-...
더보기 봄-탄생
나무의 일생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오래 활동하는 것이 뿌리이다. 뿌리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깨어나고 가을날 가장 늦게 정지한다. 지상의 눈들이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때에도 가장 섬세하고 부드러운 뿌리털이 차가운 땅을 헤집고 시린 물을 빨아들여 지상으로 옮겨준다. 새잎이 피어났다고 해서 나무가 깨어났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뿌리는 가을잎이 져버린 뒤에도 혼자 남아 한 해를 마감하는 결산 작업을 한다. 뿌리들의 애처로운 노동으로 물이 모아지면 메말랐던 줄기는 부풀어 오르고 윤이 난다…(봄, 물-숲의 살림꾼, 19)
봄이 되어 얼었던 물이 녹으면 나무들이 깨어나고 겨우내 낙엽과 흙속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운다. 뿌리는 땅에서 녹은 물을 부지런히 빨아들여 이를 줄기 속으로 올려다 주며 잎들은 겨울동안의 영양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한줄기 빛도 그냥 보내지 않고 흡수한다. 앙상했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연둣빛 잎들이 고개를 내밀면서 숲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여름-투쟁
아무리 고집 센 나무라 할지라도 일단 버섯의 균사들이 침입하여 자라기 시작하면 오래지 않아 잘게 부수어진다. 쓰러지지 못하고 죽어서도 서 있는 나무에 버섯들이 고층 건물처럼 타도 오르면 나무는 이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시커먼 폴리에틸렌 필름에 덮여 졸참나무의 속살을 발라먹고 자라는 표고버섯은 얼마나 향긋한 냄새를 피우는가. 나무토막은 3, 4년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되어 바스라진다…(여름, 투쟁-버섯의 이중성, 115, 116)
숲의 한해살이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여름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폭풍우로 인해 쓰러진 나무 위에 때를 놓치지 않고 번식하는 작은 식물들부터 곤충의 몸에 균사를 뿌려 결국 숙주의 몸을 뚫고 자라는 동충하초의 습성에 이르기까지, 숲의 여름은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다.
가을-공존
식물은 가진 것을 털어내는 데 여념이 없고 짐승들은 더 차지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어치는 개암나무를 삼켰다가 여기저기 토해 묻는다…그렇게 주장하던 영역에 대한 독점권도 포기하고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새가 방문을 했는지 관심이 없다. 모든 들짐승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데는 먹이가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먹이가 풍부하니 공존도 가능하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모든 짐승들이 잠시 동안 공존의 평온함으로,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누린다…(가을, 마감-잠시 동안의 해피투게더, 178)
성장의 욕구가 끝나고 소멸을 준비하는 시간인 가을에 다다른 숲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여유로운 얼굴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최소한의 소비기관만을 남겨야 하는 숲은 오랜만에 열매와 잎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인심을 쓰고 겨울양식 비축에 목마른 들짐승들에게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풍요로움 앞에서 이기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 해도 시련 앞에서도 철저히 탐욕스러워지는 인간과는 달리, 시련을 앞두고 타인을 위해 남겨두고 떠날 줄 아는 모습은 숲이 왜 위대한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겨울-계속되는 역사
나무의 한 해는 위대했다. 무성한 이파리의 돋아남과 눈부신 성장, 비를 가리고 빛은 다듬고…. 이른 봄, 나무의 새순은 허기에 지친 겨울 동물들의 기나긴 허기를 보상해주는 양식이었다. 순이 피어나면서 움직이는 곤충의 애벌레들도 나무의 품에서 비상을 꿈꿀 수 있었다. 새들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비행의 고단함을 달래며 나뭇가지에서 휴식한다…나무가 드리운 그늘에서 비바람을 피한 야생화들은 붉고 노랗게 한밭으로 화려한 삶을 펼친다…(겨울, 풍경-숲의 창조주, 224)
겨울은 끊임없는 시련의 장이지만, 숲이 살아온 일년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숲을 터전으로 삼는 동시에 다른 생명들에게 생활의 장을 제공한 나무들의 앙상해진 가지는 쓸쓸하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영광,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일년, 그리고 수세기 동안 숲의 번영과 쇠퇴, 부활의 시간을 함께 했던 나무들의 거친 수피는 그들의 모진 생활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숲의 역사, 나아가 생명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는 증거이다.
. 시련 : 생사의 갈림길 | 가혹한 시련 | 극심한 빈곤
. 극복 : 미리 준비하는 봄 | 겨울 숲의 보호막 | 눈(雪)속임
. 풍경 : 남는 자와 떠나는 자 | 상록수의 경쟁력 | 겨울나기의 기본 조직 | 숲의 창조주
. 생존, 그리고 시작
[출판사 서평]
▶ 지금까지 몰랐던 숲의 모든 것
웅장함과 신비로움이 넘치며, 온갖 동식물이 제각각의 생명을 뿜어내는 곳.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동경과 경외를 받은 숲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숲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책들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동식물의 사진을 가득 담은 도감은 화려하지만 살아있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전문적인 생태지식으로 무장한 번역서는 지적욕구를 자극하지만 그것은 우리 숲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사진과 딱딱한 텍스트 안에서 빛이 바래버린 숲은 이 책 [숲의 생...
더보기 ▶ 지금까지 몰랐던 숲의 모든 것
웅장함과 신비로움이 넘치며, 온갖 동식물이 제각각의 생명을 뿜어내는 곳.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동경과 경외를 받은 숲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숲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책들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동식물의 사진을 가득 담은 도감은 화려하지만 살아있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전문적인 생태지식으로 무장한 번역서는 지적욕구를 자극하지만 그것은 우리 숲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사진과 딱딱한 텍스트 안에서 빛이 바래버린 숲은 이 책 [숲의 생활사]에서 원래의 위용을 되찾았다. 전작 [신갈나무 투쟁기]와 [차윤정의 우리 숲 산책]에서 숲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생활을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풀어낸 차윤정의 저력은 이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딱딱한 과학을 재미있는 소설처럼 풀어내는 저자 특유의 문장이 물 흐르듯 펼쳐지며 저자의 눈길이 닿는 숲은 과장된 것도, 허구의 것도 아닌 숲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실감을 더한다. 또한 사계절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숲속 생명들을 그려내는 참신한 구성방식은 숲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현상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숲은 ‘생활’을 하는 ‘생명체’로 거듭나게 된다. 더불어 저자와 웅진닷컴의 전문 사진작가들의 열정이 담긴 200컷에 달하는 생태사진은 이 책에서 지향하는 ‘숲의 생활사’를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힘이다.
▶ 사계절로 읽는 생명의 역사
-감동적인 과학읽기
우리 숲 학자 차윤정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필력을 갖춘 자연과학자이다. 과학을 문학적 감성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매력의 글은 독자를 책속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 또한 단순한 개념설명으로 그칠 수 있는 글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서 어느새 개성과 의지를 가진 생명체로 태어나기도 한다. [숲의 생활사]는 ‘정지된 사물’의 특징을 나열하는 단순한 생태도감이 아닌, 살아있는 것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에서 지식 이상의 감동까지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사계절로 읽는 생명의 역사
[숲의 생활사]에서 숲은 단순한 녹색의 집합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평화의 공간, 혹은 나무와 꽃이라는 개체로만 인식되던 숲은 이 책을 통해 사계절이라는 시간을 돌려받게 되고 그에 따라 ‘투쟁하고 공존하는’ 공동체로 새롭게 다가온다. [숲의 생활사]는 계절별로 대표되는 생물종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일상과 다른 종과의 관계를 파고든다. 여름 숲에서 때 이른 죽음을 맞은 채 쓰러져 있는 나무와 그것의 줄기를 칭칭 감고 있는 다래덩굴. 두 식물 사이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이고 그것은 여름 숲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숲의 생활사]는 숲이 함축하고 있는 ‘생명의 역사’를 계절이라는 환경을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
-삶을 배우는 첫 번째 책
[숲의 생활사]는 나무, 꽃, 풀, 곤충 등으로 세분화되고 개념위주로 이루어진 그동안의 생태 정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정보라는 틀 속에 갇혀져 개성을 잃어버린 생물들은 이 책에서 숲이라는 삶의 터전 속에서 생명력 넘치고 끈끈한 관계를 가진, 살아있는 존재들로 다시 태어난다. 기존 수많은 생태서들이 가진 한계를 넘어, 우리 숲의 생태지식을 대중적인 호흡으로 풀어낸 [숲의 생활사]는 숲을 ‘제대로’ 알고 싶은 이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교과서’가 될 것이다.
-200컷의 생태사진이 펼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숲의 생활사]는 소나무숲의 안개 낀 풍경으로 서정성을 자아내다가 돌연 가시엉겅퀴의 가시돋힌 줄기가 내뿜는 살벌함을 포착한다. 포플러 나무의 웅장한 자태를 찬미하던 카메라는 땅바닥을 기어가면서 자라는 사스래 나무의 기묘한 모습에서 처절함을 끌어내기도 한다. 200컷에 달하는 생태사진은 숲의 전체풍경과 작은 생물은 물론 각 계절의 특색을 효과적으로 담아냄으로써 숲의 생로병사까지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저자와 웅진닷컴 전문 사진작가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생태사진은 이 책이 과학이라는 테두리는 벗어나지 않되 그것이 주는 딱딱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나아가 텍스트를 넘어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승화될 수 있었던 원천이다.
[출처]교보문고 20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