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텃밭에 아무것도 안 키워야지 했는데 봄이 오니, 그럴 수가 없었다. 땅을 뒤집어엎고 멀칭(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땅을
비닐이나 짚으로 덮는 일)을 한 뒤, 상추와 고추, 방울토마토를 심고 물주고 지주를 세운 다음 고랑에 부직포를 까는 일까지, 쉽지
않았다. 아내는 오이와 가지도 심어 달라고 했지만 힘에 부쳐 사양하고,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도 심어 볼까 하다가 그 욕심도
접었다. 불볕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요즘엔 아침저녁에 잠깐잠깐 하는 일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광화문에서 양평으로 연구소를 옮긴 뒤 시작한 텃밭 농사가 9년이 넘었는데 텃밭 가꾸기 첫해의 벅찬 감동과 희열을 잊을 수가
없다. 먼저 ‘텃밭 대백과 사전’부터 샀다. 뭘 시작하면 책부터 산다고 아내가 놀렸지만. 쑥갓 씨를 뿌렸더니 파랗게 올라오는 싹이
얼마나 귀여운지, 뜯어 먹으면 올라오고 또 올라오는 상추는 또 얼마나 신기한지…. 직접 키운 채소의 향과 맛은 파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목왕리의 두 평 남짓한 텃밭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배리 연구소에 마련한 열 평 정도의 텃밭에서 상추와 쑥갓은
말할 것도 없고 고추, 옥수수, 파, 딸기, 무, 토마토, 방울토마토, 호박, 수박, 오이, 비트 등 이것저것 시도를 해 보았다.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한 호미, 모종삽, 낫, 괭이, 삽, 곡괭이, 쇠스랑, 예초기에 부직포와 비닐, 지주 등이 창고를 채웠고 호스,
물뿌리개, 장갑, 가위, 밀짚모자, 장화, 우의, 농사용 방석, 토시, 분무기, 노끈, 비료 등 가지가지 짐이 늘어나자, 아내는 이제
트랙터도 한 대 사겠다며 놀렸다. 잠깐 일했는데도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결리고 여기저기 이상이 와서 침 맞고 파스 붙이고 누워
있으면 아내는 병든 닭 같다며 또 놀려댔다.
게으르고 게으른, 아직도 서툰 텃밭 농부이지만 9년간의 경험으로 얻은 첫 교훈은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었던 땅이
풀리고 봄이 다가오면 모종 파는 가게를 지나칠 수가 없어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모종을 이것저것 담는다. 그러곤 뒷감당을
못 하고 금방 일에 치여 즐거움이 노동이 되어버린다. 농기구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이것저것 사다 보면 아예 텃밭 안 가꾸고 사
먹는 것이 훨씬 싸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돈을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취미로 하는 텃밭 농사다.
농사는 시간이 나면 하거나 미뤘다가 몰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씨 뿌리고 모종 심고 풀 뽑고 순치고 수확하는 모든 게
제때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이어서 낭만으로 시작한 농사는 지속하기 어렵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 일도 아니다. 하늘이 도와야
수확도 할 수 있는지라 평생을 농사에 몸 바친 농부들도 땅을 치는 때가 있다.
모종을 심는 데에도 다 때가 있어서 날씨가 따뜻하다고 성급하게 심었다가 냉해를 입어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많다. 가족이
좋아하는 것, 쉽게 키울 수 있는 것들로 시작하여 햇볕을 얼마나 좋아하는 작물인지 그리고 물 빠짐이 좋아야 잘 자라는
작물인지를 따져가며 심어야 한다. 이어짓기도 피해야 한다. 같은 작물을 같은 땅에 계속 심으면 병충해를 입거나 특정 영양분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비료만 많이 준다고 잘 자라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세심하게 관심을 두고 자주 들러 물주고 잡초 뽑고
넘어진 줄기도 묶어 주는지, 농부의 정성과 사랑을 농작물은 귀신처럼 안다. 그냥 씨만 뿌려놓으면 저절로 된다고 자연농법을 흉내
내는 사람도 있지만 자연농이나 유기농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텃밭 가꾸기로 가족 간에 불화나 갈등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면 처음부터 상의하고 결정해야 한다. 부부 중 한쪽이 반대하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본인은 안 하더라도 배우자가 농사짓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 정도라도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 1~2년
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겠다는 자세로 가볍게 시작해야지, 덜컥 땅부터 산 뒤 농막 갖다 놓고 무모하게 일을 벌이면 가족
관계까지 망친다. 텃밭인가 뭔가 한다고 다른 일은 나 몰라라 하고 돈만 쓰고 일거리만 늘이고 햇볕에 얼굴 타는데 이것저것
시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이들이 어릴 때 텃밭 가꾸기에 동참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지만 처음에는 흙을 가지고 노는 정도로 가볍게 참여시키는 것이
좋다. 그러면 의외로 아이들은 신이 나서 농사를 놀이처럼 즐기고 부모의 칭찬이 더해지면 더 열심을 낸다. 자기가 심고 가꾸어
수확한 작물에는 더욱더 애정을 쏟고 싫어하던 채소도 잘 먹는다. 반찬 하나가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과 수고가 더해져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 음식의 소중함도 배우고.
내 땅을 갖고 텃밭을 가꾸는 경우가 아니라면 분양형 텃밭을 알아보거나 텃밭 상자를 구입해서 베란다나 옥상에서 키워 보는
것도 방법이다. 시청이나 구청, 군청 등에서 분양하는 텃밭은 평수에 따라 연 몇만 원~십 수만 원으로 체험을 할 수 있는데
가족이 좋아하고 키우기 쉬운 작물로 봄, 여름 두 철 정도의 농사부터 시작해 보자.
텃밭은 집에서 가까워야 한다. 처음에는 열심히 가꾸다가도 한 주나 두 주만 안 가도 잡초가 무성해져 엄두가 안 나고 한 달 정도
방치하면 포기해야 하는 지경이 되기 때문이다. 텃밭 가까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몇 평 안 되는 땅이니 물을 길어서 주면
될 거로 생각하지만 비가 안 오면 예삿일이 아니다.
욕심부려 너무 많이 지어 나눠 주느라고 고생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 보지 않은 사람은 농사짓는 수고로움
을 모른다. 텃밭에서 땀 뻘뻘 흘리며 고생고생해서 키운 농작물을 갖다 주어도 감사한 줄 모르고 버리기라도 하면 서운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일단 흙 묻고 볼품이 없고 벌레 먹은 농작물은 마트에서 파는 상품과 비교가 안 된다. 원하는 사람이 직접
텃밭에 와서 수확해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힘은 들지만 내가 정성 들여 가꾼 작물을 내가 직접 수확해서 먹는 희열은 그 어떤 즐거움이나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 공기가
탁한 실내 헬스장에서 흘리는 땀과는 비교가 안 된다. 내 땀으로 직접 키운 옥수수를 갓 따서 삶으니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데도
어찌 그리 달던지, 그 옥수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하루하루 커 가는 고추의 성장 과정을 보며 따 먹는 재미, 수박 씨앗 하나가
큰 수박이 되어 내 품에 안기던 감동까지,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힘은 들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엄청난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는,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위대함까지 가르쳐 주는 텃밭
농사를 이 더위가 끝나고 가을을 지나 새봄이 찾아오면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출처] 데일리임팩트 202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