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녀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잔다고 여행 가방을 끌고 왔다. 엄마, 아빠와 떨어지자마자 보고 싶다면서 “문자를 보내 달라,
통화하고 싶다”라고 계속 보채던 작년과는 달리 초등학교 2학년인 올해, 두 번째 외박 때는 제법 의젓해졌다. 가수 이름과
곡명조차 헷갈리는 에스파의 ‘드라마’와 아이브의 ‘배디’를 안무까지 해서 춤추며 노래하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아내는 동영상을
찍고 나는 관객으로 응원하며 박수를 보냈다. 동영상을 확인하곤 마음에 안 드는 걸 보완해 다시 찍겠다는 열정을 보이는 녀석이
기특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며 정서주의 ‘아씨’와 조항조의 ‘정녕’을 들려주었더니 나쁘지 않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할머니와 샤워를 하면서 또 얼마나 깔깔거리는지 저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신기했다. 역할 게임을 좋아하는 건 여전해서
감독인 손녀 지시대로 악역을 도맡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안 자고 옛날이야기를 계속해달라는 통에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진땀을
빼기도 하고.
이튿날에는 내가 즐겨보는 KBS TV의 ‘인간극장’을 보여줬더니 재미있다며 집에 가서도 챙겨 봐야겠단다. 손녀를 위해 사
둔 장기판으로 ‘튕겨먹기’를 했는데 몇 마리씩 접어주던 작년과는 달리 이제 대등하게 내기를 해도 쉽게 이기기가 어려웠다.
내가 좋아하는 끝말잇기를 어려운 단어로 척척 받아내고 X자로 뛰는 줄넘기도 가뿐하게 해내서 또 한 번 놀랐다. 루미큐브,
원카드, 모노폴리 게임도 손녀가 가르쳐 줘서 알게 된 놀이다.
제 엄마, 아빠가 얼마나 철저하게 가르쳤는지 할머니 집에서 자면서도 공부할 것을 챙기고 일기를 꼬박꼬박 썼다. 좋은 습관
들이기와 책임감 키워 주기라는 부모의 소신 덕분이겠거니 싶어 대견했다.
‘구름과 해님이 만난 날’, ‘에어컨을 끌 수 없는 날’, ‘모자가 꼭 필요한 날’이라고 날씨를 표현한 것도 놀라웠지만
‘선생님 가지 마세요. 눈물이 모여든 날’, ‘새 친구를 또 사귀었다니!’, ‘으아! 수학이 잘 안 풀려’처럼 그날의 일기에 제목을 붙인
솜씨도 감탄스러웠다.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 내용에 먹는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맛에 대한 묘사가 탁월했다. 뭐든지 잘 먹는 손녀의 식성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주재원으로 가 있는 아들 따라 미국에 사는 손녀와 손자는 아직 어려서 깊은 얘기를 못 나누지만 외손녀를 통해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딸아이를 통해서도 손녀 또래의 여자애들 일상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떼쓰고 할 일 제때 안 하고 미루며, 문제지 풀라고 하면 슬쩍 답안지 보고 베끼는 정도야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기분 나쁠 때는 엄마에게 버릇없이 대꾸하거나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정도도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커서 꼭 나랑 결혼해야 돼”라는 쪽지를 남자 친구로부터 받아오고 외손녀도 “나, 너 좋아해” 하는 쪽지를 건넸다는 얘기에도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배꼽티 입고 학교 가면 안 되느냐고 물어봤다는 얘기나 점심시간에 양치질하면서 팩까지 하는 아이, 다이어트하는
아이도 있다는 얘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환호하고 고학년 언니들을 따라 노출이 심한 옷을
흉내 내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남자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애도 있다니 빨라도 너무 빠르다 싶다.
며칠 전 초등학교 고학년 남자아이가 저학년 여자아이에게 “성관계 놀이를 하자. 돈을 주겠다. 얼마면 되냐”라고 접근하다가
거절당하자 다른 아이를 쫓아가 자기 성기를 보여주면서 “네 것도 보자”라고 했다는 뉴스는 고 또래의 자녀를 가진 부모를
경악하게 했다.
애들 키우기가 너무 어렵다는 딸아이에게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남편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조율해 나가라고 했다.
끔찍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걱정되고 불안하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고 곧 그런 일이 닥칠 듯이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면서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공포에 떨 필요는 없다고,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면 부부가 합심해서 대처하고
우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도 그런 때가 있었다. 키워 보니 지금은 뭐가 부질없는 짓이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눈에 들어오지만,
막상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떻게 키우는 것이 제대로 키우는 것인지 걱정되고 불안할 때가 많았다. 부모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유혹과 주변 학부모들의 부추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얼굴을 맞대고, 흔들리지 말고 중심 잡고 살자며
결의를 다지고 또 다졌었다. 아이들 잘 키우자면서 아이들 보는 앞에서 자녀교육 문제로 싸우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고부터는 매사를 상의해서 결정했다.
다행히 잘 커 주었고 짝을 만나 가정 이루고 별일 없이 살고들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딸네의 육아 방침과 원칙을 최대한
존중하고 부모가 금지하는 것은 우리도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지나치게 빡빡하다고 느끼는 사소한 것은 가끔 예외도
좀 만들어 주면서 손녀의 마음을 읽어 주고 다독거려 주는 쉼터, 부모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넉넉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며 고민하는 부모가 조언을 구한다면, 부모가 화목하게 사는 가정이 최고의 환경이며 자연 속에서
실컷 놀리는 것이 최선의 투자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멀리 내다보고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정말 놓치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따져 보고, 진정한 어른으로 키워서 잘 떠나보내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어린 자녀들이 성장하여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 뒤, 30~40대, 40~50대가 되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싸우는지 너무 많은 사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데일리임팩트 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