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낭독극 공연이 있었다.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였다. 바냐 역이 나에게 주어졌는데 공연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들이 석 달간의 연습 후,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발표회 형식이었다.
낭독극은 무대장치나 조명, 의상, 분장 등을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배우들이 대본을 보면서 진행하는 색다른 방식의 연극이다. 낭독극은 연극 제작 전에 투자자를 찾기 위한 시사회 형태의 읽기 공연으로 활용되다가 연극제에 참가하는 출품작을 심사하는 방편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공연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여 교육 현장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많은 자본을 투자해야 함에도 흥행 실패를 감내해야 하는 제작자에게는 관객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시험 무대가 된다. 낭독극은 동작을 최소화하고 시각적인 정보를 제한하여 문장이 가진 맛과 멋을 더 깊이 느끼게 한다. 동작 연기가 서툰 나 같은 사람에겐 대본을 암기해야 하는 부담감도 적어 안성맞춤이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러시아 이름을 발음하기조차 어려워 누가 누구인지,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분히 문학적으로 번역된 대본이 입에 익지 않아 소리 내어 연습하기를 반복했지만 큰 소리로 연습할 수 있는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처음에는 내 대사를 해석하기에 급급했지만 작품을 한 번 두 번 읽으면서 1, 2, 3막, 4막의 장소가 어디인지, 때는 또 어느 시간대인지, 전체 그림이 조금씩 들어왔다. 내 대사만 읽다가 다른 사람의 대사 속에 나의 캐릭터가 숨어 있는 것도 보였고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바냐를 통해서 대본에 나와 있진 않지만, 바냐의 성격과 과거, 고민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연출이 계속 “다른 사람의 대사를 잘 들어라, 듣고 말하라”고 해도 피부에 크게 와 닿진 않았다. 그러나 연습을 거듭할수록 상대방의 톤과 호흡에 따라 내 감정을 어떻게 갖고 가야 하는지, 내가 그렇게 대사를 하려면 상대방이 어떻게 치고 나와야 하는지도 가늠할 수 있었다. 흡사 야구에서의 투수와 타자에 비유할 수 있을지...... 타자가 어떻게 쳐야 한다는 답을 가지고 타석에 서는 건 아니다. 투수가 어떻게 던지는가를 끝까지 잘 보고 그에 맞추어 때리는 것이다. 머리로 계산하고 그렇게 흉내 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대로, 내가 연습한 대로 대사를 뱉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한 다음 반응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경청 다음으로 배운 것은 연극도 소통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그린 그림을 연출이 분석하고 연출이 그린 큰 그림에 따라 배우도 자기 역할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 상황이나 감정이 도통 떠오르지 않을 때는 연출과 자주 얘기를 나누고 1:1 연습 때에는 지도도 받았다. 연출의 의도에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울 때 내 의견을 제시하면 연출이 또 흔쾌히 받아 주었다. 상대와의 호흡이 맞지 않을 때는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묻고 내 의도도 공유하면서 서로 같은 그림을 그리려고 조각들을 맞춰 나갔다.
내 대사가 나오는 부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대사 연습 때에도 참여해 지켜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되었다. 다들 잘한다고, 음성이 너무 좋다고 칭찬하는 바람에 내가 제법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금방 들통이 났다. 연습 장면을 누가 동영상으로 올렸는데 내 눈으로 나의 연습 장면을 지켜보곤 얼마나 민망한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착각’이라는 병은 중하면 중할수록 자신만 모르는 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출연자의 연기력에 대해서 서로 지적하고 충고하는 일은 삼가라고 연출이 교육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가 서툰 사람에게 직·간접적으로 내색하고 지적하고 불만을 표현해서 마음 상한 이가 있었다. 서로 잘해 보자는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적받는 사람 마음이 어땠을까, 안쓰러웠다. 나만의 연기가 아니라 ‘우리의 연기’를 생각하며 서로 존중하고 수용하는 성숙한 자세가 아쉬웠고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왜 그렇게 강조하는지 이해가 갔다.
다른 극장에서 공연하는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이라는 작품을 연달아 감상하기도 했다. 다른 연출과 다른 배우들이 같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지 비교하며 감상하는 즐거움이 컸다. 목소리에도 시선이 있고 거리가 있었다. 마주 보고 하는 건지, 객석을 보며 하는 장면인지, 과거를 회상하거나 상상하면서 하는 대사인지에 따라 호흡과 톤이 달랐다. 그러나 배우고 느낀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은 완전히 별개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연주자나 화가, 운동선수들이 끝없는 연습과 훈련, 자기 성찰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듯이 완성을 향한 연기 수업도 뒤표지가 없는 책처럼 끝이 없을 것이다.
연극은 공동 작업이라는 사실도 절감했다. 연극보다 단순한 낭독극임에도 불구하고 연습 시간에 빠지지 않고 시간 지키기, 대본에 서로 약속한 사항 메모하기, 호흡을 맞추고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뒤풀이에 참석해서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기, 공연 전에 짐 나르고 포스터 붙이고 청소하고 의자 정리하기 등 서로 지키고 힘을 합쳐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서로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연습 과정에 묻어나왔고 그날그날의 컨디션이나 기분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달랐다.
대본을 처음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게 두 시간 가까이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공연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완성도가 높아지고 음악과 음향이 더해지고 포스터가 나오고 리플렛 제작을 위한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면서 하긴 하는 모양이구나, 실감이 났다. 공연 당일, 리허설을 마치고 관객이 자리를 채운 뒤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니 누워 있던 대본이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게 아닌가!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은 참 특별하고 매력적이었다. 내 속에 너무나 많은 나, 그중에서 배역에 맞는 ‘나’를 하나씩 꺼내어 표현해 보는 희열이 짜릿했다. 이런 매력이 있기에 배우들이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열 일 제쳐놓고 연습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그 과정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꾸준히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만나는 건 축복이다. 몇 년 전,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15주간의 연기 아카데미를 마치고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무대에 서 본 경험과 더불어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리라 믿는다. 연극은 경청이고 소통이며 함께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라는 사실이 어찌 그렇게 우리 삶과 닮았는지,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출처] 데일리임팩트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