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 토레스, 멕시코에서 열두 살 때 LA로 이주한, 한낱 잡부 신세였던 그가 잭 콘래드의 눈에 띄어 그리도 꿈꾸던 촬영 현장에 투입된다. 몇 차례의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화사의 임원으로 출세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넬리를 구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본인마저 영화판을 떠난다.
내가 꼽은 이 영화의 압권은 잭 콘래드와 영화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과의 대화 장면이다. 20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엘리노어가 ‘잭 콘래드는 이제 끝났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발표하자 설전이 벌어진다. 왜 그런 기사를 썼느냐고 따지는 잭에게 그녀는 “무엇이 궁금한가? 내가 왜 그런 기사를 썼는가가 아니라 관객들이 왜 당신의 연기를 보고 비웃었는지를 알고 싶은 거냐?”며 이렇게 응수한다.
“이유는 없다. 당신 외모나 목소리 탓도 아니다. 당신 시대는 끝났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잭이 다시 일리노어에게 반격을 가한다.
“당신은 스스로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가십거리나 쓰는 기자였다. 내 덕분에 당신 같은 사람이 먹고사는 거다. 당신은 바퀴벌레 같은 사람이다.”
그러자 엘리노어가 다시 일침을 놓는다.
“집에 불이 나면 인간은 타 죽지만 바퀴벌레는 불을 피해 어둠 속에서 살아남는다. 당신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는 못 받았지만, 난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았다.”
세계적인 스타의 눈에는 바퀴벌레같이 더럽고 혐오스러운 인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스타보다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삶을 택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유독, 잭과 넬리와 매니, 세 사람의 말로에 관심이 갔다. 정상에 섰다가 인생의 내리막길을 마감하는 방법이 제각각이었다. 엘리노어에게 고맙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쓸쓸히 떠난 잭은 자신과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하는 또 한 명의 여자,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내를 남겨 두고 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넬리는 자길 위해 영화사도 옮기고 재기를 위한 파티도 열어 주고 도박 빚까지 갚아준 매니와 멕시코로의 탈출 길에 나선다. 하지만 결혼해서 애 낳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매니가 잠시 자리를 떠난 사이, 마약에 취해 춤을 추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평소 자신이 말해왔던 것처럼. 그리곤 시체로 발견된다. 매니는 악의 소굴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지만 자길 기다리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넬리를 더 기다릴 수 없어 멕시코로 도주한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길을 택한다.
인생의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걸으며 삶을 마감하는 방법이 다 달랐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를 떠올려 보았다. 인생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고 위험한 등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약해지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정상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그 정상에 계속 머물 수도 없다. 언젠가는 정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다들 잊는 것일까. 산 아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내려오는 법을 미리 익혀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인간인지….
[출처] 데일리임팩트 2023/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