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기어이 걸리고야 말았다. 열이 있어서 감기인가 싶었는데 장모님과 손주들 볼 생각에 병원에 갔더니 양성이었다. 팍스로비드 처방을 받은 뒤, 아내가 바리바리 싸준 밑반찬을 들고 바로 양평 연구소로 떠났다. 며칠 후 아내의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와서 다행이었다.
회의와 심사, 결혼식과 가족 모임, 식사 약속, 자전거 모임은 양해를 구하니 오히려 다들 걱정해 주었다.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 일상에서 깨닫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절감하는 나날이었다. 일단 휴대전화를 껐다. 증세가 가볍기도 했지만, 산과 들이 보이고 새와 잠자리, 달과 별이 놀러 오는 연구소에서 음악 듣고 책 읽고 먼 산 쳐다보며 멍때리고 새와 꽃들과 대화를 나누는 생활이 답답하진 않았다. 봉쇄수도원에서 평생을 지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격리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자원해서 연장한 보름 동안의 격리 생활은 견딜만했다.
일주일의 격리가 끝난 뒤, 날이 좋으면 연구소 근처 중미산 임도를 걸었다. 햇살을 안고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인적이 없는 숲길은 고요 그 자체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찬란한 햇빛과 이슬을 머금은 풀잎, 지천으로 핀 들꽃과 흘러가는 구름이 너무 이뻤다. 계곡에 발을 담그자 발가락 사이로 돌돌 흐르는 시원한 물에 머리까지 맑아졌다. 가슴 깊이 들이마신 숲 향기로 몸과 마음을 씻으니 일상의 소음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고요가 찾아왔다. 어머니 품속에 안긴 듯,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평화가 온몸으로 번졌다.
고요가 찾아오니 그간의 다양한 내 삶의 모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번잡하게 안 살고 단순하게, 내 삶의 속도대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분주한 하루하루를 반복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확인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검색하고, 수많은 정보를 굳이 다 알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뭘 그렇게 휴대전화를 놓지 못했는지... 병원이나 식당, 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도 못 기다리고 휴대전화에 눈을 주던 것도 고쳐야 할 습관이었다. 약속이나 모임, 회의에 내가 빠져도 별문제가 없었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TV나 음악을 틀고 차 타자마자 라디오부터 켜는 습관도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싫은 소리 안 들으려고,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무리하는 내가 보였다. 좀 더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지나쳐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었겠구나 싶었다. 빈틈이 없거나 항상 긍정적이기만 해도 밥맛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음도 보였다. 확실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직책을 맡고는 끌탕 하는 모습도 못나 보였고.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하다 보면 그 사람도 나를 챙기게 되어 서로가 피곤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베푸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늘 반기는 것도 아니었다. 중용과 균형이 필요했다. 베푸는 기회도 적당히 양보해야 상대방이 부담을 덜 느끼는 법인데... 말도 많았다. 혀로 짓는 죄를 줄이기 위해서도 말수를 줄이고 침묵하는 절제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한다.
숲속에서는 애써 꾸미거나 감출 것도 없고 능력이나 성과를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었다. 내 모습 그대로 고요를 즐기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지나치게 번잡한 일상과 경쟁, 피상적인 것들로 넘쳐나는 우리네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일까 자문해 본다. 내적인 공허함을 물질이나 돈, 성공, 명예 따위로 채우려고 에너지를 소진하고 탈진하는 건 아닌지, 관계가 단절될까 두려워 과잉 네트워크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거나, SNS에 끊임없이 글과 사진을 올리며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구걸하고 있는 건 아닌지, 휴일이나 휴가를 의미 있게 보냈다는 뿌듯함을 맛보기 위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오락이나 술, 레저로 일정을 채우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사회와 국가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해내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건 아닐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질적, 정신적인 유행에 휘둘리고 더 큰 자극과 재미에 중독되어 끝없이 뭔가를 좇는 소비적인 삶을 재정비해야 팬데믹이나 기후변화 같은 대재앙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면서 무절제한 삶의 방식을 정리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겠다. 본능과 충동에 휩쓸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닫으면 심리적 불구가 되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프고 어색한 일이다. 다들 그래서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자기 성찰을 중단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사는 건 아닐까? 기독교에서 왜 그렇게 주일을 지키라고 강조하는지 알 것도 같다. 종교를 떠나 누구나 일주일에 한 번쯤은 마음속의 주일을 정해 놓고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마음 밭에 거름을 줄 일이다. 숲이나 절, 교회, 사막을 꼭 찾아야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걸 잠시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세상의 소음 한가운데서도 내 안에 이미 순수하고 고요한 방 하나가 존재함을 깨닫는다. 코로나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출처 : 데일리임팩트(https://www.dailyimpac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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