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연명의료 결정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 이후 의미 없는 연명치료는 안 받겠다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이 7월 말 현재, 138만 5562명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문화가 확산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회생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임박한 ‘임종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 제한하여 대상의 폭이 좁고 요건도 까다로워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하소연도 많다. 말기 암 환자 등으로 그 대상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식물인간인 상태는 제외하고 있다.
2018년 당시 104세였던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의사 조력자살을 선택해 화제가 되었었다. 스위스의 안락사 지원
단체인 디그니타스를 통해 의사 조력자살을 감행한 한국인이 3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 윤영호 교수팀이 2021년 3월부터 4월까지 19세 이상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자살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결과, 찬성 비율이 76.3%로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안규백 의원은 의사 조력자살 합법화를 위한 법안을 지난 6월 발의한 바 있다.
죽을 권리를 과연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인간에게 죽음을 앞당길 자유가 있는 것일까? 그릇된 생명관으로 경제적인 효율성만을 따져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은 살인 행위라며 강력하게 반발하는 종교계에서는 자기 결정권을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지속해서 죽음을 호소하는 이에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고 반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의학계와 생명학계, 종교계, 시민사회, 윤리학계 등 각계 전문가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의사 조력자살이나 안락사가 악용되고
남용되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어떤 문제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지 외국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고 깊이 있게 연구할 때가 되었다. 생산성과 효율만 따져 노인과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회적 타살’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유산이나 재산을 노려 안락사로 포장하는 범죄 또한 철저히 가려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이성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가족의 동의하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고통 없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 다양한 탈출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여러 차례의 자살 시도로 실패와 고통을 반복하다 외롭고 위험한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나는 자살을 줄일 수 있는 차선책이라면 무조건 반대할 수만도 없다.
당장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의사 조력자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안락사까지 허용하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같은 나라도 있지만 역사적인 배경이나 문화 등을 무시하고 무조건 도입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일명 존엄사부터, 치료하지 않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인 안락사, 의사가 직접 투약하는 적극적인 안락사. 처방은 의사가 하되 복용이나 투약은 본인이 직접 하는 의사 조력자살까지, 그 장·단점과 문제점, 해결책을 함께 강구하며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아직도 시기상조라고 계속 미루기만 하거나 문제점이나 부작용을 내세워 논의조차도 막아버린다면 간병살인이나 가족 동반자살 같은 더 큰 불행을 양산하게 된다.
안락사를 논의하기 전에 무엇보다 연명의료 결정 제도가 존엄한 죽음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줄 필요가 있다. 의사와 환자, 가족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의사들의 방어적인 치료 때문에, 그리고 병원 대부분이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서 생기는 연명의료 결정 제도와 현장 간의 거리를 좁혀 나가야 한다. 간병서비스 체계를 확립하고 입원형, 가정형, 자문형 호스피스 병원과 인력을 크게 늘려야 한다. 의사 조력자살과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의료를 국가가 책임지는 선진국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면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자. 인위적인 방법으로 무리하게 생명만
연장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이며 무엇을 위한 일인지, 의료진이 죽음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가족의 고통과 사회적인 비용만 늘리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장소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보자. 자기가 살던 집에서 일상을 영위하다가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장례식장과 화장장이 아니면 죽음을 볼 수 없는 우리 현실은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의료 패러다임을 치료에서 돌봄으로 바꾸고, 자살하고 싶은 충동에 대해서도 터놓고 얘기하며 고통스러운 지금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상담할 수 있는 창구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더 자주 얘기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화제로 삼으면서 죽음을 공부하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사회 분위기
부터 만들어나갈 일이다. 죽음을 한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나라가 된다면 죽음의 질도 높아지리라 믿는다.
출처 : 데일리임팩트(https://www.dailyimpact.co.kr) 202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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