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 산소와 우리의 생가, 진주에서 식당했던 집과 서울로 올라와 살았던 집들을 돌아보았다. 인터넷으로 미리 확인해 보지 않았다면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옛 동네를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며 더듬었다.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는 2박 3일 여정으로, 삼 형제만 여행을 떠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98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동해까지 걸어서 걸어서 14박 15일 동안 국토를 횡단했던 가족여행은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눴던 이번 삼 형제 여행은 또 다른 의미로 묵직하게 다가왔다.
스물일곱 살이었을 때 남도로 부자 여행을 함께 했던 아들은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요즘엔 아내와 둘이서 여행을 자주 간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은 못 갔지만 지방에 강의가 있을 때면 되도록 아내와 동행해서 하루 이틀 머물며 여유 있게 그 지역을 돌아보고 오는 여행이다.
코로나로 여행길이 막혀 있다가 서서히 여행객이 증가하고 있는데 요즘은 가족 중심의 여행이 늘어서 반갑다. 끈끈한 가족애를
다지면서 이해의 폭도 넓히고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만드는 좋은 기회이다. 가족여행은 일탈로 빠지기 쉬운 향락적인 여행을 예방하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가족이 함께 여행만 떠나면 무조건 즐거운 것은 아니다. “다시는 가족여행 가나 봐라.”하고 갈등만 키우며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늘 내가 준비하고 예약하고 돈도 내가 더 많이 쓰는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마음에 안 든다며 불평하는 가족 때문에 상처만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뭘 바라고 시작한 가족여행은 아니지만, 마음고생, 몸 고생하면서 비위를 맞추고 있는 나에게 지금 뭘 하는 짓인가 싶어 짜증이 나고 화가 치민다는 사람도 보았다. 따라가 준다고 착각하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내가 생각한 만큼 가족들이 좋아하지도 않아서 힘이 빠졌다는 이도 있다.
즐거운 가족여행을 위해서는 첫째, 가족이 무엇을 원하고 싫어하는지 가족의 욕구나 관심사, 취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부모나
배우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의 여행은 불만을 불러온다. 세대 차. 남녀 차,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이나 식사하는 시간, 식성 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이 동질적인 집단 같아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단히 이질적인 집단이다. 다들 결혼하여 배우자를 맞기라도 하면 성장 과정이나 양가의 가족문화, 성별, 나이, 직업, 가치관이나 취향이 다 다르다. 모두 다 만족시키려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이번 여행은 부모님을 위해서, 다음 여행은 아내나 아이들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짜고 가족의 동의를 얻어내면 불만을 줄일 수 있다. 안 가겠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데려가서 싸우지 말고 부부만 떠나는 것도 해결책이다.
둘째, 역할 분담을 적절하게 하여 한두 사람만 희생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놀 때 같이 놀고, 쉴 때 같이 쉬는 원칙도 필요하다. 금전적인 부담이나 시간 할애, 몸으로 때우는 역할 등을 지혜롭게 분담하여 다 같이 참여해야 책임감도 생기고 각자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다.
셋째, 가족여행이라고 해서 모든 일정을 끝까지 함께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다 함께해야 화목한 가족이라는 신화는 옛말이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관심사에 따라 반나절이나 한나절 정도 따로 즐기면서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따로 또 함께’의 지혜를 발휘해 보자. 배가 고픈 사람은 먹고 안 고픈 사람은 건너뛰고, 식성이 다르면 두 팀으로 나눠서 각자 먹고 싶은 것 먹고 난 뒤, 다시 만나는 융통성도 나쁘지 않다.
넷째, 꼭 어디론가 떠나서 돈 들여 외식하고 쇼핑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해외가 아니면 국내도 좋고 2박 3일이나 3박 4일이
아니면 하룻밤만 자고 오는 일정이나 당일 여행도 좋다. 지나치게 빡빡한 일정보다 좀 느긋하게 일정을 짜야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집에서 뒹굴뒹굴 TV 보고 맛있는 것 시켜 먹으면서 선풍기 바람에 시원한 수박 쪼개 먹는 것으로 ‘방콕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온통, 어디로 떠나야 할지 그리고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을지로 도배를 해 놓았다. 하지만 가족 간의 사랑과 배려, 소통으로 평소의 화목한 관계를 먼저 다져놓아야 즐거운 가족여행도 기대할 수 있다.
가족여행에도 난이도에 따라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처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손주들까지 함께 떠나는 대가족여행이나 사돈과
같이 여행가는 모험은 서두르지 않는 게 좋다. 가벼운 부부 여행, 모녀 여행, 부자 여행, 아니면 자매나 형제끼리 떠나는 여행으로 시작해서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여행으로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 결혼해서 각자 가정을 꾸렸지만 같은 부모 밑에서 함께 먹고 자고 뒹굴며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형제자매들만, 배우자의 양해를 구한 뒤 부모님 모시고 떠나는 원가족 여행도 해볼 만하다.
가족여행을 떠날 수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 가족은 이미 건강하고 화목한 가족임이 틀림없다. 골치 아프고
신경 쓰이는 일은 딱 질색이라며 무조건 가족여행을 반대하고 회피할 일은 아니다. 누군가가 죽고 나면 다시는 함께 갈 수 없는 그 가족여행을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제안해 보자.
출처 : 데일리임팩트(https://www.dailyimpact.co.kr)20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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