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와 함께 묻힐 자리를 계약하고 왔다. 죽으면 갈 집이 생겨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다면서 아내는 홀가분해했다. 아내의 가장 가까운 친구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넋을 잃고 지내는 친구를 보고 오더니 아내는 이젠 결정을 하자며 재촉했었다. 난 어디에 묻혀도 좋고 어떤 방식이어도 좋으니 아이들이 문득 우리가 보고 싶을 때 찾아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이면 된다며, 최종 결정권은 무조건 아내에게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코로나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입었던 옷을 벗기지도 않고 비닐 팩으로
밀봉하고 다시 시신 백에 넣은 다음, 염습은커녕 관이나 영정, 위패도 없이 화장부터 해버리는 가슴 아픈 이별도 있다. 상주가 코로나 확진자여서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하는 경우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조문객 수가 제한되고 조문객들의 체온 측정, 출입 기록부 작성 등으로 텅 빈 빈소를 혼자 지키는 사람도 보았다. 장례식장과 화장장을 구하지 못해 5일장, 6일장을 지내는 사람이 늘면서 자신의 거주 지역으로 화장장을 유치하려는 움직임까지 번지고 있다.
고인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 업무상 알게 된 사람들에게까지도 마구잡이로 부고를 보내거나 화환 수와 조문객 숫자를 과시하는
장례식도 많았었다. 화환이 너무 많아 리본만 따로 떼어 주욱 늘어놓는 장례도 적지 않게 보았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을 잃었다. 그러나 이참에 간소한 가족장으로 치르는 건강한 장례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고인을 추모하는
과정은 없이 상조업체나 장례식장의 패키지 상품에 모든 것을 맡기고 돈으로 때우는 장례식은 이제 졸업할 때이다. 앞으로도 장례문화가 또 변하겠지만 가족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각자 형편과 처지에 따라 장례를 치른다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알리고 부의는 받지 않으며 종이 관이나 검소한 관으로 치르는 가족장이 더 확산하기 바란다. 비싼 수의가
아니라 평상복으로 보내드려도 무방할 것이다. 냉장 시설이 잘 갖춰진 요즈음엔 전통적인 방법으로 몸을 씻기고 소렴, 대렴 등의 염습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도 필요하다. 화려한 제단 장식이나 상복, 고인에게 바치는 생화, 조문객들을 위한 음식 접대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간소한 가족장을 마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비난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주가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부인이 상주로 조문객을 맞는 장례도 많아지기를 바란다. 가족끼리 장례식을
다 치른 후 주변에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직계가족만 참석하여 화장을 한 뒤 발인을 나중에 하는, 친척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장례도 검토해볼 만하다. 조문을 정중하게 사절하고 마음만 받겠다며 계좌번호를 알리는 것도 크게 비난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꼭 인사를 해야 할 처지인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겐 고마운 대안이 될 수 있다.
8년 전, 어머님이 중환자실에 계실 때, 평소 어머님의 뜻을 좇아 형님들과 사전장례의향서를 작성했었다. 큰형님은 이런 걸 굳이
작성해야 하느냐는 눈치였지만 덕분에 어머님의 장례식을 별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병구완이나 장례식, 상속 등으로 싸우다가 금이 가는 가족들을 많이 보았다. 사전에 부모가 분명한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뜻보다는 유족의 체면을 앞세우는 경우도 있고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가족들이 편을 나누어 부의금을 가지고 싸우다 깨지는 경우도 보았다.
6년 전, 14년간 키우던 반려견을 떠나보내면서 아이들에게 아내와 함께 미리 작성해 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사전장례의향서를
보여 주었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뜻을 얘기해 주었지만 서면으로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먼저 언급하기는 어려운 일일 터이기에 우리가 먼저 분명하게 밝혀두자고 아내와 약속한 일이다.
죽음은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어서 미리미리 자기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족 간의 대화나 논의를 거쳐 준비된 죽음을 맞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하자는 것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죽을 준비를 하자는 것도 아니며 죽음 체험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나의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자는 의미이다. 가족들과 편안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사후에 별 문제없도록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한 뒤, 고통과 후회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죽음에서는 그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법이다. 죽음도 삶의 내용이나 질이 받쳐주지 못하면 완성될 수가 없다. 잘 죽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은 치료 대상도 아니고 정복 대상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딸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 손주들을 데리고 우리 부부가 입주할 묘지로 소풍이라도 가야겠다.
출처 : 데일리임팩트(https://www.dailyimpact.co.kr) 2022/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