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둘째 아일 낳았다. 친정이 부산인 며느리가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아내와 함께 아들 집을 찾았다. 손녀를 돌보는 아들을 도와주는 조력자일 뿐이었지만 나흘이 절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손녀와 한집에서 지내는 기쁨과 즐거움 또한 컸다.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밥 먹이고, 컵 쌓기와 찰흙 놀이, 역할 놀이에 빠져 깔깔대고 웃으면서 다시 어린애가 된 것 같은 희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렇게 좋은 걸 진작 알았더라면 애 낳기 전에 손주부터 볼 걸”이라며 우스개를 늘어놓던 선배가 떠올랐다.
하지만 자기 삶의 중심에 손주를 두고 상황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않고 맹목적인 사랑을 일방적으로 퍼붓는 ‘손주 바보’는
되고 싶지 않다. 지나치게 손자녀 중심으로 살다 보면 배우자의 불만을 부르기도 하고 정작 손자녀의 부모인 자녀와 양육 문제로 부닥친다. 손자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 다 해 주다 보면 손자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뭘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키워준 공도 모르고 원망을 퍼부으면 꼴도 보기 싫은 사이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도 절제와 지혜가 필요한 법인데 간섭과 잔소리까지 더 하면 손자녀도 반발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며 축복이요 선물이긴 하지만 성숙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유념할 사항도 있다.
1. 손자녀를 키우는 주 양육자는 부모임을 명심하자. 조부모는 조력자일 뿐이며 부모의 양육 원칙과 태도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특히 손자와 손녀를 차별하거나 친손주와 외손주를 달리 대하는 것은 갈등을 부르는 지름길이다.
2.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가지 말고 미리 약속하고 방문하는 예의는 갖추자. 손주 데리고 오라 가라며 자녀들을 힘들게 하지
말고 사진과 동영상, 영상통화로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랠 줄 아는 절제도 익히자.
3. 손자녀는 부모와 조부모의 관계를 통해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자녀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손자녀와의
관계도 원만해진다. 손자녀 앞에서 부모의 험담을 늘어놓거나 자녀와의 갈등에 손자녀를 끌어들이는 일은 금물이다.
4. 일방적인 선물 공세나 물질적인 도움으로 손자녀의 환심을 사려 하거나 경쟁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손자녀를
인정해 주고 지지하면서 넉넉하게 품어주는 태도가 중요하다. 부모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시간에 쫓기고 쪼들리며 일과 육아에 치여 긴장과 스트레스에 싸여 있다. 그런 때일수록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외로운 손자녀에게는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필요하다.
5. 손자녀의 나이에 따라 조부모의 역할이 달라야 한다. 어린 손자녀와는 잘 놀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부모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손자녀 하나하나의 기질이나 개성, 특성을 파악하여 눈높이를 맞춰 주자. 손자녀와의 친밀한 관계도 커갈수록 멀어지는 법이다. 그들의 일상을 존중해 주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서운함을 덜 수 있다. 성적이나 옷차림, 돈 씀씀이, 이성 친구나 귀가 시간, 대입이나 입대, 취업, 결혼 등 현실적인 문제로 자녀와 싸우느라 먼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부족한 부모를 대신해서 고민 상담을 해 주고 삶의 지혜를 전해 줄 수 있는 조부모라면 훌륭한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자부해도 좋다.
6. 풍족한 시대에 태어나 결핍을 모르는 손자녀에게 지나치게 근검절약을 강요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원하는 것을 기어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손자녀 세대에게는 충동을 조절하는 힘과, 자신의 소비에 대하여 책임지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7. 시도 때도 없이 손주 자랑을 늘어놓는 바람에 결혼 안 한 자녀나 아이가 없는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삼가자.
주위를 돌아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황혼 육아의 늪에 빠져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자식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건강을 해치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노부모들을 위해서라도 ‘아이 키우기 좋은 세상’을 국가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혈연관계인 내 손주만 손주가 아니라 또래 아이들도 내 손주처럼 생각하고 혈연 외적인 관계로까지 범위를 확대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환경을 내 손주들에게 만들어 주는 일이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손자녀와 함께 살 세월이 그만큼 길어진 요즈음, 손주들에게 베푸는, 조건 없는 사랑은 사랑의 절대적인
양을 크게 늘릴 뿐만 아니라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충만감으로 손자녀의 삶에 평생토록 큰 자양분이 된다. 새해에는 ‘손주 바보’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지혜롭고 따뜻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라도 내 삶을 가꾸고 건강부터 챙길 일이다.
출처 : 데일리임팩트(http://www.dailyimpact.co.kr)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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