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중독
책을 보다 말고 잡초라도 뽑을까하고 텃밭으로 나왔다. 뽑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또 잡초가 무성하다. 나도 모르게 팔을 걷어붙인다. 잠시 쉬는 시간에 머리라도 식혀볼 요량으로 나온 건데 텃밭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잠깐만 하려고 시작한 일이, 하다 보면 한 시간이 지나 두 시간을 넘을 때도 있다. 물을 주다 보면 목마른 녀석들이 환성을 지르며 여기저기서 “여기요” “저도요”하고 외치는 것 같아 발길을 돌리지 못하기 일쑤다. ‘내년에는 그만 둬야지. 하더라도 파와 고추만 심어야지.’ 거듭 다짐을 하건만, 여섯 번째 맞는 올봄에도 어김없이 또 일을 벌이고 있으니 그야말로 ‘텃밭 중독’이 아닌가 싶다. 광화문에 있던 연구소를 양평으로 옮긴 후 시작한 농사다. 농사라 부르기도 민망한 텃밭이지만, 두세 평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열 평이 넘고 보니 게으른 농부에겐 힘에 부치는 대농이다.
‘텃밭 가꾸기 대백과’, 내가 텃밭농사를 시작하면서 처음 한 일은 책을 사는 일이었다. 나는 뭘 시작하면 책부터 사는 버릇이 있다. 탁구와 자전거도 그랬고 기타에 도전하면서도 책부터 샀다. 집을 지을 때는 열 권 가까이 책을 사들였다. 끝맺음도 못할 거면서 책만 잔뜩 산다고 아내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농사인데도 따져 보니 꽤 많은 작물들을 키웠다. 상추와 쑥갓으로부터 고추, 옥수수, 감자, 방울토마토, 토마토, 파, 부추, 들깨, 딸기, 강낭콩, 호박, 무, 배추, 마, 수박에 이르기까지...... 여섯 해의 농사 경험을 돌이켜보면, 책에서 구한 지식보다는 땀을 흘리며 몸으로 경험한 ‘시행착오’가 더 크고 확실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텃밭농사를 시작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내 경험을 늘어놓게 된다.
무엇보다도 욕심 부리지 말라는 얘기를 꼭 해 주고 싶다. 많이, 빨리, 그리고 최고로 잘 짓고 싶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해 농사짓고 나가떨어지거나, 농사가 즐거움이 아닌 노동이 되어 파스 붙이고 침 맞으며 아이구야, 아이구야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농사 지어 내다 팔아 돈을 벌어야하는 전업농부가 아니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작물, 가족이 즐겨 먹는 채소 위주로 쉬운 농사부터 짓기를 권한다. 나는 가장 재미있고 보람 있었던 농사가 고추와 파 그리고 옥수수였다. 고추는 이어짓기 장해나 탄저병이 심해 결코 쉬운 농사가 아니다. 그러나 나처럼 모종 몇 주 심어 풋고추 따먹는 정도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얀 꽃이 핀 후 그 앙증맞은 고추가 자라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맛보는 아삭이고추는 싱싱 그 자체이다. 땅에 묻혀 있어 수확한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는 감자나 고구마 농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상추나 쑥갓도 처음에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몇 해 지어 보니 신선함이 떨어졌다. 역시 고추농사, 파농사의 재미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우리 음식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게 파인데 아내가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주문하는 파를 밭에 나가 바로 배달해 주는 보람이 크다. 아침에 갓 따서 바로 쪄먹는 옥수수 맛 또한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어 사먹는 옥수수는 끊은 지 오래다.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아도 직접 키운 옥수수를 따자마자 바로 찌면 달기까지 하다. 내 입에 들어가는 옥수수도 맛있지만 내가 키운 옥수수를 갓 따서 손녀에게 먹이는 기쁨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농사의 기쁨이 자칫 무리한 욕심을 부를 때도 있다. 종묘상을 지나칠 때 충동적으로 씨앗이나 모종을 너무 많이 사서 나중에 뒷감당을 못하는 일은 텃밭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본 일일 것이다.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넘쳐나는 작물을 버리지 못해 매일 같은 채소만 먹는다면 금방 질리고 만다. 때가 이른데도 종묘상에서 권하는 대로 사다 심었다가 냉해를 입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 빨리 심어서 냉해를 입기보다 오히려 조금 늦게 심는 것이 낫다. 작물은 외부 기온이 아니라 땅의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야 성장하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둘째, 텃밭 때문에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는 일을 예방하려면 농사에 관한 일은 미리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다. 텃밭 농사를 위해 땅부터 덜컥 사는 일이야 당연히 없어야겠지만, 주말 농장 또한 가족들과 상의하여 집 가까이 있는 것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서너 평만 해도 4인 가족이 넘치도록 먹을 수 있는 양을 키울 수 있으니 땅 욕심도 버리자. 배우자나 가족에게 일을 강요하거나 모처럼 텃밭에 가서 잔소리 하는 것 또한 삼가야 한다. 남편 혼자 농사짓는 것조차 못마땅해 하는 아내도 있다. 하긴 주말만 되면 집을 비우고 손질도 안 한 채소 갖다 주면서 허구한 날 식사 준비하라고 재촉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셋째, 처음부터 너무 많은 농기구와 비료, 영양제 등을 사들이는 일은 결국 후회만 남기니 절제하는 것이 좋다. 나 역시 자제하고 자제했는데도 세어 보니 꽤 많은 농기구를 이미 사놓았음을 발견했다. 호미가 둘, 낫이 세 자루, 삽 두 자루. 전지용 가위 두 개, 괭이, 곡괭이, 쇠스랑, 숫돌, 정글도, 물뿌리개. 호스, 농사용 방석, 장화, 대여섯 켤레의 장갑...... 게다가 수시로 옷을 벗어대니 아내가 빨래하기 바쁘다. 퇴비나 비료, 영양제도 대용량 포장으로 판매하니 소규모 텃밭 농부로서는 남아돌기 일쑤다. 이것저것 농기구들이 많아지고 지출이 커지다 보면 그것이 또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에 1년에 한두 번 쓰는 농기구는 빌려 쓰기를 권한다. “이제 관리기와 트랙터까지 사겠네.” 라며 아내가 농담을 한 적도 있지만 이제 뭘 사는 일은 크게 줄었다.
수익 극대화가 목표인 전업농부들은 작물을 최대한 빨리, 크게 키우려고 애쓴다. 그래서 토지 이용 효율을 높이고 단위면적당 생산량과 수익을 늘이기 위해 비료와 농약을 많이 쓴다. 그러나 작물 고유의 성장 속도에 맞춰 제철 작물을 타고난 크기 정도로 키우면 그 고유의 맛은 사서 먹는 작물과 비교할 수가 없다. 텃밭에서 천천히 햇빛을 듬뿍 받고 자란, 건강하고 영양가 많은 채소는 맛도 좋을뿐더러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진 체험까지 선물한다.
넷째, 텃밭농사를 짓다 보면 남아도는 작물을 나눠먹는 데에도 지혜가 필요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문자나 영상으로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게 된다. 그러면 주위에서는 부러움 반 기대 반으로 유기농 채소 좀 얻어먹어야겠다는 농담으로 답을 해온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제 때에 와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면 농사지은 것을 갖다 주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다 내가 알아서 나눠주겠다고 큰 소리까지 쳤다면 안 갖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서 고생을 하는 셈이다. 이 일을 세상의 부모님들은 어떻게 평생 하셨을까 감탄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초보 농사꾼이 어설프게 지은 농작물은 마트에서 파는 상품과 비교가 안 된다. 인사치레로 잘 먹겠다고 얘기는 하지만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을 뿐 아니라 먹지 않고 버리는 일도 생긴다. 그러니 텃밭을 가꾸는 가까운 이웃과 서로 교환하거나 오고 가는 길에 편하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쓰고 보니 장황한 얘기가 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속으로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씨만 뿌려놓으면 알아서 잘 크는 걸, 몇 평 안 되는 텃밭을 가지고 뭐 그리 유난을 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저 내갈겨두었다가 수확하는 벌레 먹은 채소나 잘 자라지도 못하고 기형적으로 생긴 채소가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작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기본을 갖춘 텃밭농사꾼이라면 작물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소중히 대하는 법이다. 밭을 갈아 흙이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고 부족한 영양분을 퇴비로 보충도 해 주어야 하고 퇴비를 뿌리고 2주 정도 기다려야 가스 피해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포트에서 모종을 어떻게 빼서 어느 정도 깊이로 심고 어떻게 물을 주어야 하는지도 초보 농부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추나 토마토 같은 작물은 적당한 높이의 지주를 모종 심기 전이나 직후 깊게 박고 줄을 쳐 주어야 바람이나 비에 쓰러지지 않는다. 옥수수는 쓰러지면 바로 세워주고 북주기도 해 주면서 제 때에 따야 알차고 맛있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손녀가 갖다 준 방울토마토 모종까지 옮겨 심고 손녀가 옥수수와 방울토마토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아직은 어려서 밭일을 시키기는 어렵지만 조금 더 크면 텃밭에서 흙을 가지고 노는 기회부터 만들 생각이다, 그러다가 물주고 풀을 뽑는 일 정도는 시켜볼 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이면 손녀들이 좋아하는 모종을 함께 심고 커 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공유하고 같이 수확도 해 보는 꿈도 꾸어 본다.
텃밭 일이 고달파서 날씨가 더워지고 허리도 아파오면 이제는 텃밭농사를 작파해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새 봄이 찾아와 연두색 싹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 또 가슴이 설레니 이 병을 어찌할꼬? 행복한 고민에 또 다시 웃음이 절로 난다.
20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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