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떠나면 정말 가까운 사람들과 가족에게만 알리거라.
고인의 얼굴도 모르면서 눈도장만 찍고 가는 손님은 사양한다.
추모가 없는 형식적인 조문은 이제 좀 바뀌어야지. 비싼 수의나 관도 필요없다.
종이관도 있다니 화장해서 천주교식으로 수목장 해 주렴. 부의는 받지 말고.
좋은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가족들과 작별 인사 나누고 사후에 별 문제 없도록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한 뒤
고통과 후회 없이 떠나면 잘 죽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면 크게 흔들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만, 그것도 오만일지......
적어도 ‘당하는 죽음’이 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준비를 잘 해야겠지.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란다.
당장 죽을 준비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죽음 체험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지는 말자는 뜻이다.
어느 날 문득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거나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왔을 때, 당황하고 절망하는 경우는 없어야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사색하며 내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자는 얘기다.
한 사람의 죽음 속에는 그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법이다.
죽음도 삶의 내용이나 질이 받쳐 주지 못하면 완성될 수가 없단다. 잘 죽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하는 거지.
죽음 앞에서는 부와 명예와 권력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평소에는 왜들 그렇게 비우고 내려놓는 것을 잘 못하는지......
어쩌면 그래서 한 방에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죽음의 힘이 위대한 거겠지.
죽음은 치료 대상도 아니고 정복 대상도 아니니 자연스럽게 얘기 나누면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자.
바다야, 시내야!
1998년 1월, 기억나니? 시내가 중3, 바다 네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
서울에서 동해까지 보름간 걸어서 걸어서 국토 횡단 떠났던 거......
그렇게 먹고 싶다는 막걸리 한 잔과 쥐포 한 마리를 안 사 줘서
두고두고 짠순이 회계를 원망했던 거, 시내 너 기억하니?
숙소가 없어서 바다 너를 데리고 불쌍한 표정 지어가며 하룻밤을 구걸했던 기억도 새롭다.
마지막 백복령 고개를 넘을 때는 눈이 엄청 왔었지.
낯선 집 처마 밑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을 때,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뜨거운 물 한 잔을 건네던 할머니도 생각난다.
“국토횡단 좋아하면 당신이나 하지 왜 죄 없는 애들과 마누라까지 개고생을 시키느냐”며 엄청 혼냈었지.
영국 기숙사에 너희들을 두고 뒤돌아 나오며 터지는 울음을 삼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가가 젖는다.
고맙다. 사랑하는 시내와 바다야!
반듯하게 성장하여 어엿한 가정 꾸리고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으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니?
너희들 덕분에 아빠도 되고 시아버지에 장인, 할아버지도 되어 보고 사돈도 생겼으니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봄이 때문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너희들은 잘 모를 거다.
기쁨이 송송 샘솟는 그 순간, 순간을 너희들 아니었으면 어떻게 맛볼 수 있겠니?
세 살까지의 재롱으로 부모에게 할 효도는 다 한 거라고들 하더라만,
너희들은 봄이를 통해 또 한번 효도를 하고 있다.
고맙다.
3년 전 내 생일에 봄이를 선물하더니 10월이면 친손주를 볼 수 있다는 소식을 이번 설에 또 전해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올해 최고의 선물이다.
결혼한 지 20년쯤 되니까 부부가 뭐고 남편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
그리고 회갑을 맞아보니 그제야 철이 드는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그런대로 잘 산 것 같아 모든 것이 고맙다.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것만이 기적이겠니? 할머니 돌아가실 때 보니까 뭔가를 삼킬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요
내 힘으로 눈을 뜰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더라. 돌아보면 모든 게 선물이고 감사할 일이지.
우리 더 많이 감사하고 더 자주 베풀면서 살자.
회갑을 맞으며 좀 더 적극적으로 나누고 봉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바다와 시내야!
할아버지는 내가 고 2때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너희들 곁에 남아, 너희들에게 힘이 되는 아버지가 되는 게 소망이다.
다만 짐은 되지 않는 아버지이길... 또한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나도 노력하마.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실컷 놀리는 것이 남는 농사임을 잊지 말아라.
우수가 지나니 이제 봄이다.
실은 동지만 지나도 난 봄을 느낀단다.
해가 조금씩 길어진다고 생각하면 내 맘에는 벌써 봄이 찾아오니까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봄.
꽃비처럼 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4월에 봄이 데리고 다들 정배리로 놀러 오너라.
양평의 속살을 속속들이 보여 주마.
화살나무에도 연초록 잎이 돋아나고 노란 별처럼 산수유 꽃도 열리겠지.
올해는 꽃잔디도 꽉 짜여 더욱 예쁠 거다.
하얀 목련 꽃이 그 때도 남아있을지 모르겠다만, 여리디 여린 쑥 곧 캐서 향긋한 쑥차 끓여 놓으마.
2019년 2월 19일
정배리에서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