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잊은 음식점
“우리 손자들인데 잘 해 주이소.”
제주도에서 올라온 가족들을 위해 주방에 특별히 부탁을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살갑다.
주문을 받다가 손님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가족이 가져온 떡을 직원들과
나눠먹는 장면엔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 사이 다른 테이블에선 소동이 벌어졌다. 주방에서
아까 내보냈다는 탄탄면이, 손님 테이블엔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탄탄면을 찾느라 소동이
벌어져도 개구쟁이처럼 ‘Goo~ ~d’을 날리던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웃었다.
첫 손님을 맞기 위해 전 직원이 대문 앞에 나와 ‘어서 오십쇼’를 외치는 모습부터 시종 미소를
자아내는 이 특별한 식당.
KBS 추석 특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주문을 잊은 음식점’ 얘기다.
개그우먼 송은이가 총지배인으로, 이연복 중식요리사가 총괄셰프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20:1의 경쟁률을 뚫고 출연한 다섯 명의 경증 치매인들이었다.
80대 초반부터 70대 중반까지의 주부 두 명, 교사 두 명, 공무원 한 명이 손님을 맞고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역할을 맡았다.
메뉴판을 주지도 않고 주문을 하라는 실수도 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 후식부터 갖다 주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치매를 앓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선한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식당 밖 그들의 일상을 따라가 보면 미소만 지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마트에서 사오라는 물건은 까맣게 잊고 본인이 좋아하는 사과만 사 가지고 와 난감해 하는
부부의 모습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옷을 거꾸로 입거나 뒤집어 입은 줄도 모르는 엄마 앞에서 눈물짓는 딸 모습에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났다.
웃기면서도 슬프고 귀여우면서도 가슴 따뜻한 프로그램이었다.
치매에 대해 기분 좋게 다룬 프로그램이 없어 이런 기획을 했다는 제작 의도가 신선하고도 고마웠다.
‘치매에 걸린 사람을 앞으로, 단순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송은이의
소감이 기억에 남는다. 미리 설명만 해 주면 조바심내지 않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손님의 얘기에도 공감이 갔다. 치매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희망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치매에 대한 걱정으로 40대 초반에 나도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꽂고 ‘내 카드가 어디 갔지?’하며 찾기도 하고 나와 만나기로 하고 연구소로 들어서는
은사님을 보며 ‘선생님이 무슨 일로 오셨나?’싶어 순간 어리둥절한 적도 있다.
친구와 점심 약속 장소로 가다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서야 약속을 이중으로 해 놓았음을
알고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아침에 여유 있게 신문 보면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어디쯤 오느냐?’는 전화를 받고 충격에 빠진 적도 있다. 조찬 강의를 깜빡 잊은 것이다.
사회 저명인사와 원로들이 대부분인 모임이었는데 면목이 없어 슬그머니 탈퇴를 해버렸다.
다행히 치매는 아니라고 했다. 일시적인 과부하가 걸려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 아내나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혼자서만 알고 슬그머니 덮어버린
크고 작은 실수는 그 후에도 꽤 많았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다시 감고,
깜빡 하고 약을 두 번 먹은 뒤 혼이 난 뒤론 기억이 안 날 때에는 약은 절대 안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식당에서 2만 7000원을 낸다면서 5만 원짜리 세 장을 주고 ‘왜 빨리 계산을
안 해 주지?’ 한 적도 있다.
치매는 아니라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93세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고 2년 정도 약을 드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년 전 치매 검사도 받고 뇌 사진도 찍어보았다.
아직은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마음이 놓이는 건 잠시 뿐, 일상 속의
낯선 순간들이 나를 얼어붙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치매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치매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치매가 찾아온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내에게 “치매로 판정이 나면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그리고 증상이 심해지면
시설로 보내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 두었다.
노후의 삶을 치매에 걸린 배우자 간병하느라
소진하지 말고 마라톤 같은 싸움에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 보살펴 주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제가 치매는 처음이라서요. 잘 좀 봐 주이소. “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로 한 다섯 명의 노인들이 처음 만나 밝은 얼굴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서로 묻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1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