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으로 방송된 ‘아빠를 부탁해’를 보았다. 연예인 특유의 입담 덕분에 가족들과 웃으며 보기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짜안했다. 딸과 눈도 못 마주치고 딸이 방학한 것도 모르는 이경규씨의 사연도 안타까웠지만 조재현씨 부녀의 얘기는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비록 웃으며 하는 얘기였지만, 아빠와의 어린 시절 추억이 거의 없다는 조재현씨 딸의 얘기에 가슴이 찡했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지만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 식사를 해서 좋았다는 그 딸이 엄마 아빠가 대본 연습하는 거실을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아빠에게로 다가가고 싶은 절절한 몸짓으로 보여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어릴 때 아빠는 ‘너무너무너무’ 바빠서 TV에 출연하는, 우리 집에 사는 사람 정도로 알았다는 얘기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연도는 기억하지만 매년 나이가 바뀌어 딸이 몇 살인지를 바로 대답 못하는 장면 앞에서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3일만에 만난 딸과 인사 한 번 안 하고 대본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며 아빠들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 필사적일까 싶었다. ‘펀치’라는 드라마를 통해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 시대의 뛰어난 배우지만 아빠로서는 결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었다.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 보배이지만 아빠 역할, 남편 역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수많은 아빠들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통해서 희망도 보았다. 부녀 관계가 바로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믿는다는 조재현 씨 눈이 촉촉이 젖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제 먹어도 아빠가 끓여주는 게 최고라며 라면을 맛있게 먹는 이경규씨 딸의 모습 속에서도 두 사람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강력한 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어서였다. 끊임없이 다가가며 애정을 표현하고 딸의 안마에 한없이 행복해 하는 조민기씨, ‘영원히 변하지 않을 남자’임을 자부하며 손전등까지 켜고 익숙하게 딸의 귀지를 파주던 강석우씨의 모습에서도 많은 아빠들이 역할 모델을 발견했으리라 믿는다.
돌아보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부녀가 24시간 관찰 카메라에 잡히면 우리 집도 비슷할 거라는 아내와 아들 녀석의 얘기대로 아직도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다행히 교육과 관련한 직장에 오랫동안 몸담고 ‘가족’을 평생의 화두로 삼겠다고 결심을 굳힌 후, 내가 주장하고 가르친 대로 살려고 꾸준히 노력한 덕분으로 많이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CEO 자리를 내려놓고 ‘가족문제 예방’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 나의 결단이 참으로 고맙고 대견스럽기만 하다.
출연한 네 명의 아빠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을 시청한 많은 아버지들이 어떤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늘리고 그 시간을 함께 즐길 줄 아는 아빠, 이제 부쩍 성장한 아들딸의 생각과 취향, 가치관 등 자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아빠, 서로의 속 깊은 애기를 더 자주 나눌 줄 아는 소통하는 아빠로 거듭나는 계기를 말이다.
그러나 한두 번의 시도로 가족관계가 바로 회복되리라고 성급한 기대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이전의 가족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같은 시도로도 그 결과가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딸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도 명심하자. 단순히 딸아이에게 잘 하는 것만으로 관계 회복이 안 되는 부녀도 있을 수 있다. 나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주었던 상처에 대해서 아빠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변화된 모습을 한결같이 보여주어야만 딸들이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자녀들 역시 부모에게 먼저 다가가고 부모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부모가 베푸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은 이제 20대가 된 자식들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20년~30년 가까이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공부까지 시킬 것인가? 무뚝뚝하고 표현 못하는 50대 아빠만 탓할 게 아니라 애교 없고 나만 생각하는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나의 태도도 반성해야 한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다정하게 손잡고 팔짱 끼고 어깨라도 주물러 드리는 딸과 아들들이 더 많이 생길 때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변화가 올 것이다.
스스로 못 변하고 스스로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변화하기를 바란다. 일개 연구소나 기업, 정부 부처도 못하는 그 일을 방송이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방송의 폐해도 심각하지만 훌륭한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이 사회를,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그 방송의 힘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시청률 1위나 대박, 이런 유혹이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정말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를 보고 싶다.
봄이다. 눈과 얼음이 녹고 파아란 새 싹이 돋고 예쁜 꽃이 만발하듯이 이 땅의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부부, 그리 온 가족 간에 화해와 웃음과 행복의 꽃들이 활짝 피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다. “아빠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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