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들의 자화상> 이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3개월쯤 되었나, 아니 거의 반 년이 다 돼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슴이 설렜다. 샤워를 하는 아내를 기다리며 거울에 내 몸을 비쳐보기도 하고 귓등에 향수도 뿌려봤다. 은근한 눈초리를 보내거나 손목만 잡아도 야멸차게 뿌리치던 아내였는데, 늘 그 짓만 생각하는 짐승 보듯이……. 오늘은 ‘나 샤워 먼저 할까?’ 하는 내 제안에 아내는 웃기만 했다. 조명도 조절하고 음악도 은은히 깐 뒤, 샤워를 마친 아내와 한참을 씨름하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왜 잘 안 돼?” 아내의 그 한 마디에 맥없이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에, 갑자기 당황한 K가 불쑥 내뱉은 말은 “응? 으응, 배가 고파서......” 아내도 뭐라고 얘기를 더 못하고 돌아누워버렸다. 무참해진 K가 식탁으로 나와 식빵을 우적우적 씹고 있는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비참한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나? K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고였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S대 경영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서 승승장구하던 K는 임원 승진 문턱에서 번번이 쓴 잔을 마셨다. 이러다가 이 자리에서도 잘리는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나는 요즈음이다. 이제 40대 후반, 맞벌이로 두 사람이 열심히 벌어도 고등학생인 아들과 딸, 둘 공부시키기가 늘 벅찼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병원에 입원하셔서 병원비에 간병비까지, 요즘은 내 노후가 완전히 저당 잡힌 기분이다. 노후에 아이들이 날 봉양할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못 하면서도 병든 어머님은 외면할 수 없는 낀 세대의 애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돈 몇 푼 더 내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어서 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와는 요즘 얼굴 볼 시간도 없었다. 대기업의 부장이란 자리는 ‘월화수목금금금’처럼 일해도 업무에 끝이 없었다. 여자여서 티낸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아내 역시 직장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늘 따가운 눈초리가 불편했다. 가족식사나 대화할 시간도 없었고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진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내가 이제껏 무엇을 위해 달려왔던가,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앞으로의 내 인생, 2막과 3막이 어떻게 될지 K는 두려웠다. 40대 한국 남성들의 모습이 K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쁘고 분주하게 뛰어다니지만 부부 둘만의 시간이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메일과 문자, 카톡, 페이스북 등, 많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지만 문득 마음이 허전해서 연락이라도 하려면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과잉네트워크의 허상인 셈이다. 좀 더 넓은 아파트, 좀 더 좋은 차를 위해 열심히 뛰어서 차와 집을 장만했지만 즐겁고 기쁜 건 잠시일 뿐, 또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뛰어야 하는 삶에 이젠 지치고 말았다. 고달픈 하루하루를 달래보려고 술 한 잔 하고 넥타이 풀어 이마에 동여매고 혁대로 노를 저어보지만 해방감은 술에 취했을 때 잠시 그 때 뿐, 술이 깨고 나면 무거운 일상이 자신을 더 무겁게 짓누른다.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아내가 기다리는 건 옛말이 된지 오래고 자신을 반갑게 맞는 건 개밖에 없다. 조금 일찍 귀가하고 가정적인 남편, 다정한 아빠가 되면 가족들이 날 반기겠지 했었다. 하지만 일찍 귀가해도 아이들은 자기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고 그저 용돈 말고는 관심 따윈 오히려 귀찮아했다. 애들은 요즘 왜 또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엄마하고 동맹을 맺어 자신만 따돌리는 것 같아 서러운데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아내는 자기도 돈 번다고 또 얼마나 목소리가 커졌는지…….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써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하룻밤쯤 새는 것은 끄떡없었는데 요즘은 하루만 야근을 해도 다음 날 영 기운을 차릴 수가 없다. 무릎도 시원치 않아 바닥에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아이구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연속극을 보며 눈물짓다가 남자가 무슨 청승맞게 질질 짜느냐고 아내한테 구박을 받기도 한다. 남의 경조사 챙기느라고 주말도 없이 등골이 휘지만 정작 가족끼리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옛일이 된지 오래다. 그럼 30대 남성들의 삶은 어떨까? 결혼 2년차인 38세의 L은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여자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여자가 맞나 싶었다. 깔끔하고 여성스럽고 빼어난 외모까지 갖춘 이 여자하고 결혼만 하면 깨가 쏟아지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 깔끔하고 여성스러웠던 바로 그 매력이 내 발목을 이렇게 잡을 줄이야! 양치질을 하는데 왜 이렇게 치약을 튀겨 놨냐. 소변보면서 왜 오줌은 이렇게 흘리냐, 정리정돈은 왜 이렇게 못 하냐. 제발 좀 씻어라, 이는 왜 안 닦고 자냐, 이렇게 더러운 사람인줄 알았으면 난 절대 결혼 안 했다, 따라다니면서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 우리는 안 맞는 부부인데 이렇게 억지로 사는 건 아닐까, 애 생기기 전에 이혼하는 게 오히려 정답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로 잠이 오질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라 하루에도 십 수 번 심각하게 고민이 되니 치료를 받아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2주 전엔 왜 생수 병에 입을 대고 마시느냐, 난 입 안 댔다, 이런 문제로 아내와 대판 싸운 뒤, 각방을 쓰고 있다. 그 날 이후, 날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아내가 요즘은 무섭기까지 하다. 이 여자가 이렇게 독한 여자였었구나, 생수 때문에 이 정도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이혼할 사람이다 싶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집 사고 애들 초등학교에 입학시킨다는데 우리는 30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직 애도 없으니 어느 세월에 애 낳아서 키우고 집을 살까, 앞이 캄캄했다. 아내는 자기가 버는 돈은 자기 치장에 다 써버리는 사람으로 말릴 수가 없었다. 모든 건 최고급이어야 하고 유기농에 명품에, 그녀의 허영과 사치를 내가 모르진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었다. 이렇듯 30대 한국 남성들의 삶도 크게 행복하지 않다. 스펙 쌓느라 그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여기까지 밀려 밀려 왔지만 여전히 앞길은 막막하다. 조직과 성과를 내세우며 경쟁과 생존만을 외쳐대는 직장 문화에 적응하기도 쉽지가 않다. 건강을 과신하고 운동 안 하고 폭음을 일삼다 보니 30대 남성들은 비만에 만성 피로까지 겹쳐 건강에 가장 취약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양성평등적인 사고방식으로 아내를 제법 돕는다고 하는데도 ‘그게 왜 돕는 거냐, 당연히 해야 할 일 하면서 웬 생색을 내느냐’고 아내가 쐐기를 박으면 나만 바보처럼 사는 게 아닐까, 자괴감이 든다.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도 잘 사는 남자들이 많은데 내가 마누라 버릇을 잘못 들였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아내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우선순위를 내가 조금만 조정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른 사람 축하해 주고 직원들 사기 진작하느라 쓰는 돈과 시간의 몇 분의 일이라도 가족에게 할애한다면 가족들이 얼마나 좋아할까.그리고 이 사회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남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우리 부부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찾아야 한다. 이제까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부모가 원하는 일류대와 성공, 부 그리고 늘 남들과의 비교와 경쟁으로 진정 행복하질 않았고 공허하기만 했다. 그리고 문득 문득 다가오는 불안과 무력감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끊임없이 내가 소모당하고 있다는 느낌과 내가 정말 이제까지 잘 살아 온 걸까,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하는 막막함으로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바쁘다고, 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현실이 어디 그렇게 만만하냐고, 변명하고 핑계 대던 태도는 이제 집어치워야 한다. 부부 공동의 목표와 꿈을 세우고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한다. 정말 내가 외롭고 지쳤을 때 나를 위로해 주는 최고의 자산이요 선물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혜롭게 거절하는 방법도 배울 필요가 있다. 남의 일 해결해 주고 부탁 들어주는 일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에너지를 좀 더 투자해야 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 왔는데, 열심히 죽자 살자 사다리에 매달려 올라갔는데 도착 지점이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면 그 ‘열심히’가, 그 ‘죽자 살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나친 죄책감이나 자기 비하도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것이 남성들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출세와 성공만을 강조하는 지나친 경쟁사회도 문제다. 구조적인 문제나 회사 탓,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태도도 문제지만 모든 것이 내 잘못이요, 나의 무능력이라고 자신을 탓하는 것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돈 벌어서 아이들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고 좋은 것 더 풍족하게 사다 준다고 기를 쓰고 일했다. 하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생긴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기 위해 또다시 술 마시고 마사지에 돈을 써야 한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 끊어야 한다. 내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작 잃어버린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우리 아내와 우리 아이들의 의식과 기대치도 놀랄 만큼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에 따라 아버지 역할, 남편 역할을 또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이제 공부하고 연습해야 한다.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이 남자에게만 있는 세상도 아니니 가족을 먹여 살리는 부담도 나누고 집안일과 아이 키우는 일 역시 부부가 분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얘기 안 하는 것이 남자다운 것은 아니다. 이제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도 좀 하고 자녀들과도 힘든 상황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말 우리 부부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뭘 배워야 할 것인지 돌아보자. 지금도 결코 늦지 않다. 이제부터라도 공부하고 연습하고 실천하는 길만이 한국 남성들의 살 길임을 명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