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10시 반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같은 분당에 사는 친구였다. 우리 집 근처에서 고등학교 동창들과 술 한 잔 하고 있으니 나오라는 거였다. 2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막 집에
들어오는 길인 데다 감기 몸살로 몸이 무척 안 좋았지만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 술은 사양하기로 하고 옷을 다시 주워
입고 나갔다.
술집 안이 탁해 바깥 테이블로 나왔는데 밤바람이 차다고 윗도리를 건네며 술을 강권하지 않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
다음 날에도 감기는 어떠냐고 안부를 물어온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밤늦은 시간에 친구 아니면 누가 전화를 하겠느냐고, 그리고 누군가가
부르자고 해도 그 자식 부르지 말자는 친구가 있었다면 또 연락을 안 했을 거 아니냐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얼굴과 이름조차 잘 모르지만 3년을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경계를 내려놓고 친해질 수 있는 것이 고등학교 친구가 아닌가 한다.
요즈음 나이가 들고
직책이 높아질수록 인간관계가 더욱더 중요해짐을 절감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원래 이기적이긴 하지만
더불어 함께 살아갈 이가 없다면 어떻게 이 긴 세월을 버텨낼 수 있겠는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관계가 아닌가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에 실패하면 그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그것을 보상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일차적 원천이 가족이며 친밀감을 학습하는 첫 번째 대상도 가족이다.
가족 간의 조건 없는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경험이며 삶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가족을 통한 긍정적인 정서적 경험은 정신 건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족관계 중에서도
부부관계, 부모 자식관계. 형제자매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친한 친구나 동료, 이웃이라도 관계가 나빠지면 안 만나고 살기도 하고 관계를 정리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부부는 이혼이라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는 아무리 싸워도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관계이며 부모자식이나
형제자매는 누군가가 사망하기 전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 전공이 가족학이기도 하지만 가족관계학, 그중에서도
부부관계에 관심이 많다. 긴 세월을 같은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함께 먹고 자는 사람이 부부 말고 또 있을까? 많은 인간관계는 내가 이익을 보면
상대방이 손해를 보고 내가 손해를 보면 상대방은 이익을 보는 관계다. 하지만 부부는 어느 한쪽이 불행해지면 배우자가 결코 행복해지기 어렵다.
그리고 관계가 나빠지고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관계를 쉽게 정리할 수도 없다.
그렇게 소중한 부부지만 가장 함부로 대하기도 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화목하게 지내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부부는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평균 수명도 길고 건강도 훨씬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노후에 부부가 다정하게 손잡고 걸으며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관계로 성장시키려면 지금부터 부부농사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함을 잊지 말자.
부부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모자식 관계이다. 고부갈등도 장성한 자식과 부모와의 갈등이다.
친정어머니와 딸 사이나 장모와 사위 간에도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하고 부를 가져도 자식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노후가
불행한 사람이 많다. 부모 자식 간도 어느 한쪽이 불행하면 다른 한쪽이 행복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가 각자 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그 외에도 형제자매 관계, 조부모와 손자녀 관계 등 가족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은 둘도 없는 재산이고 능력이며 축복이고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여서 조건 없이 나를 위해 희생해 줄 것 같은 가족이지만 가족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해 내가 먼저 베풀고
배려하고 용서하며 예의를 잃지 말아야겠다.
강학중 한국사이버대학교 부총장/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국민일보 문화칼럼 청사초롱 201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