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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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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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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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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봄입니다. 산소에도 풀이 많이 자랐겠지요. 새들도 가끔 놀러오는지요? 아버님 막내 아들이 벌써 쉰을 넘겼습니다. 시내가 이제 스물 일곱, 바다가 스물 넷이니 손녀 사위를 볼 날도 그리 멀지 않았군요. 큰 형님 아들 호준이가 올 초에 결혼을 했는데 아버님이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요. 세 며느리가 시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일 년에 한 번씩 고향 산소를 찾아 아버님께 인사 올리는 것은 저희 집의 가장 큰 연례 행사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더라면 막내 며느리를 무척이나 예뻐하셨을 텐데 그 사랑을 못 받아 아쉽다는 얘기를 집사람은 자주 합니다. 아버지, 젊어서는 약하셨던 어머님이 요즘은 오히려 더 건강해지셨습니다. 산에 다니시고 배드민턴 치시고 교회 열심히 다니시며 적게 드시니 건강의 조건은 다 갖추신 셈이죠. 아버님이 옆에 안 계시다는 것 말고는......
아버지!
기억나세요? 예닐곱살 막내 아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버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구구단을 외던 것을요. 할아버지 산소에 갔다오는 날 기분좋게 취하신 아버님이 버스를 기다리며 구멍가게에서 사 주시던 박하 사탕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폐암 말기의 고통을 이겨내시느라 장롱의 손잡이를 달그락거리시던 모습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노래는 참 못하셨죠? ‘푸른 하늘 은하수’를 거의 타령으로 부르셨으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그 점은 제가 아버님을 닮지 않았나 봅니다. 노래를 잘 한다는 인사를 가끔 받곤 하니까요. 그러나 손재주는 참 좋으셔서 무엇이든 잘 만들고 고치셨죠. 그런데 그 손재주 또한 물려받질 못해 저의 집은 제 처가 고치고 옮기는 일을 도맡아 한답니다.
하지만 4남매 중 제가 아버님을 가장 많이 닮았답니다. 느긋한 성격하며 머리빠진 것까지...... 몇 달 전 아버님에 관한 인터뷰를 하던 기자가 제게 묻더군요.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나 아픈 기억이 없느냐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기억은 없다고 하자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애써 미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없는 상처를 꾸며내 말할 순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화가 나서 언성이라도 높일라치면 왜 언성을 높이느냐고 조용히 타이르셨죠. 매를 드실 때에도 감정적으로 저희들에게 화풀이하시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시고선 당신의 감정을 추스르셨죠. 많이 배우지도 못하신 아버님께 그런 지혜가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하면 역시 지식이 다는 아닌가 봅니다. 조상을 모시는 것과 형제간의 우애를 유난히 강조하셨던 아버님, 금전적인 유산을 남기진 못하셨지만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가장 큰 유산으로 남아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일을 제가 지금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 아버님께서는 막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돌아가셨지만 저는 오래도록 시내와 바다 옆에서 건강하게 살아남아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아버지이고 싶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고 가르치듯이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정한 할아버지, 따뜻한 시아버지, 그리고 먼저 다가가고 싶은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아버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아버님께 써 본 편지, 올 가을에 뵙고 직접 아버님께 올리겠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출처] 서울특별시 건강가정지원센터 2008 vol.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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