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방송 녹음을 마친 뒤 저녁 약속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잠시 이발소를 찾았다. 광화문 대로변에
이런데가 있을까 싶은 소박하고 아담한 이발소에서 예순을 넘긴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인사로 시작해서
고향이 남해이고 광화문에서 십수 년 이발소를 하고 있으며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올해 나이가 예순둘이라는 사실까지,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머리 감기 등, 일체의 서비스는 손님 스스로 한다지만 이발비가 5,000원이면 참 싸다 싶었다. 20-30년 전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이발소의
모습이었다.
혼자 운영하는 이발소라 손님이 붐비는 날이면 점심 먹을 새도
없이 바빠서 요즘은 힘에 부친다는 얘기도 했는데 저녁엔 할머니가 가게로 와 수건도 빨아 주고 청소를 마친 다음 같이 퇴근한다고 했다. 이제 예순을 넘기고 손자 손녀까지 봤으니 이 일도 그만두어야겠다는 말에 굳이 그만두실 것까지 뭐 있겠느냐고 내가 열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거나 손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이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만둘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지금
연세에 아직도 할 일이 있고 용돈과 생활비를 직접 벌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큰 축복이냐는 얘기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돈을 벌면
얼마나 더 번다고 그러느냐고 이제 일 그만두고 자기랑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면서 노년을 좀 재미있게 살자고 성화지만 아직은 좀 더
벌어야겠다고 했다. 아예 그만두는 것은 좀 이르지만 부인의 소망도있고 하니 영업 시간을 한두 시간쯤 줄이거나 토요일날 쉬는 것은 어떻겠느냐,
그리고 이발 요금을 1,000원쯤 올려도 별 무리가 없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나의 제안에 생각을 한번 해 보겠다고
했다.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가 노년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건강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 더 귀중할까. 평생 일만을 위해 산 남편과
오붓한 시간 한번 못 가져 본 아내를 위해 일을 지금 하면서 능력이 되는 날까지 일을 놓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삶의 속도를 내가
조절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큰 행복일까를 생각하며 나의 은퇴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필자]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좋은생각 2006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