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치면…
형님하고 소주 한 잔 했으면 좋겠다고 사업을 한다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그 전부터
어떤
얘기인지는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얘기를
들 어보니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혼한지 16년, 사업한답시고 바빠 일과 친구와 술로 가정을 못 돌본 건 인정하지만 요즘은 아내가 술이 취해
실수를 하는 바람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망신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불경기에 사업도 안 되 는 데다가 건강도 예전같질 않고
잠자리조차 시원칠 않아 고민이 많다고 했다. 사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넓은 아파트에 넉넉한 생활비, 좋은 차에 골프까지 치게 해 주는 남편에게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자기도 한다고 최선을 다 했지만 이제는 힘들고 지쳐 포기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옛날의 나는 이러진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하소연에 뭐라고 얘기를 해 주어야 할지 나도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고성이 오가다 냉랭한 침묵이 집안을 내리누르는
분위기를 아이들도 눈치를 챘는지 중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이 아빠에게 ”이혼을 하더라도 우리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하라” 는 얘기에 충격을
받아 요즘은 문득 문득 ‘자살’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는 호소였다.
후배 얘기를 들으며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지를 떠올리며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나 역시 회사 일에 파묻혀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게 바쁜지를 잊고 산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400여 개 지점의
150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작지 않은 회사 경영을 위해 가정과 가족을 뒷전에 밀어두 고 일 중심으로 살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려드는 결재와 계속 되는 회의 그리고 퇴근 후까지 이어지는 행사와 술자리…… 아내와의 약속은 늘 뒷전으로 밀렸고 휴일에는 피곤에 젖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힘들기만 했다. 다시 중심을 잡고 무엇을 위해 내가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의 항로를 찾 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 중심으로만
살았다면 오늘의 내 모습, 그리고 10년 후의 내 삶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20여 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지 7년, 다시 ‘가족’ 이라는 주제를
붙잡은지 5년, 내 결심에 조금의 후회도 없다. 사장실, 비서, 기사, 차량, 골프회원권, 헬스권 그리고 7년 전의 1억에 가까 운 연봉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기 득권이었지만 지금의 내 생활에 조금의 불만도 없다. 가정과 내 일을
병행할 수 있고 내 나이 60, 70이 되어도 계속해서 연륜을 쌓아갈 수 있는 일, 그리고 책 읽고 글 쓰고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적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내 일’ 을 찾았으니 말이다. 내 노후와 말년을 위해 나는 매일 열심 히 예상문제를 풀면서 착실하게 적금을 붓고 가장
확실한 노후 보험에 가입해 둔 셈이니 매일 큰 돈을 벌고 있는 것이
다.
우린 살면서 참 많은 역할을 수행 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라면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로서, 아들과 친구로서, 그리고 남동생과 오빠 또는 이 웃과 교우 등등……. 그러나 한국 남성들의
경우 지나치게 일 중심으로 살다 보니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가 많다. 요 즘 같은 불경기에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것쯤은 감수하고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얘기에 일면 수긍은 하지만 그런 생활을 10년, 20년 계속했을 때의 가정생활을 떠올려 보면
걱정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책임을 남자들에게만 다 떠넘기기에는 이 사회의 구 조적인 문제가 너무 많음도
인정한다. 성장 위주의 경영 방침이나 무한 경쟁, 집안 일은 여자 일이라는 고정관념, 그리고 조화로운 양성성을 교육받지 못 한 성장 환경과
지나치게 술을 권하는 우리의 음주 문화, 여가 문화 등등……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구조적인 문제만을 핑계삼아 변명으로 일괄할 순
없는 것이다.
고개 숙인 남자, 젖은
낙엽, 간 큰 남자 시리즈 등을 화제삼아 자조 섞인 한숨만 을 내 쉴 때가 아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부터
몸소 실천에 옮기는 행동만이 해결책이다.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고 피곤 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우선 순위를 둘 일이다. 무엇이 급하고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인지를 돌아보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일과 가정의 균형을 생각할
때다. 아버지 역할, 남편 역할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거나 돈으로 살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과 친구와 술에 찌들어 집안일을
아내에게만 미루어 둘 때 아내는 남편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아이들은 아버지 없는 나날에 길들여지며 이 제 더 이상 남편이나 아버지를 원치
않고 월급만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돈 벌어오는 역할에만 의미를 두던 남편과 아버지가 그 ‘돈’마저 못 벌어오면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
되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내가 이런 고생을 한다고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자들이 가정에서 밀 려나는 것이다. 내 삶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 ‘일’에서조차 타의에 의해 밀려나면 내가 없어지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돼 가족이 없는 가정, 가정이 없는 가족을 양산하는
것이다.
우린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며 누군든지 언젠가는 은퇴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매출 신장, 이 익의 극대화,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 등등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조직원들의 가정이 안정되고 행복 해지는 것이 우리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고
생산성을 높이는 지름길임을 깨닫 는 기업들이 늘고 있어 고무적이다. 단기적인 목표에 급급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일류가 되기 위해
친가족적인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어 희망적이다. 이제 가족은 일개인이나 개별 가족에게 만 맡길 수 있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회사의 일이요 우리 사회와 가족의 일이다. 별거나 이혼, 학대, 가정폭력 같은 가족문제로부터 빚어지는 온갖 사회문제나 범죄를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지불하는 천문학적인 예산 이 바로 우리의 세금이요, 기업들이 부담해야할 빚이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지 말자. 정말 그
‘떄’를 놓치고 후회하는 불쌍한 중년과 노년의 남자들을 너무 많이 보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필자]
강학중(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디어패밀리 2004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