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중이, 학중이, 우리 학중이
재작년이던가 모 TV 방송국에서 어떻게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키웠는가를 알고 싶다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한 편 찍자는 제의를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우리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키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을 했다.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커 주어 늘 아이들에게 고맙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대학생과 고등학생으로 아직은 크는 중이어서 ‘성공’을 속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시 찾아와 사정을 하고 권유를 하는 바람에 내 얘기를 찍지 말고 우리 어머니 얘기를 촬영하면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제의를 했다.
본인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자식 공부시키러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와, 남편을 잃고서도 여자 혼자 몸으로 4남매를 대학까지 졸업 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으니 어머니야말로 사업가라면 성공한 사업가라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진주다. 67년에 고향을 떠나왔으니 4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며느리들과 손자 손녀들은 시아버지와 할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고향에 있는 아버님 산소를 매년 찾아 뵙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4남매 중에서도 내가 유독 똑똑해 서울의 경기 중학교, 경기 고등학교와 서울 대학교로 보내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기억이 생생한,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학중이, 우리 학중이’였다.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부모님은 막내 아들 자랑을 빼놓지 않으셨고 날 잘 모르는 친척들은 어머니가 제공한 정보에 의해서 학중이는 괜찮은 녀석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식이 넷이었지만 나는 1/4 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사랑을 받았고 어쩌면 그것은 다른 형제들에게 편애로 비치진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똑똑한 놈, 크게 될 놈 그리고 대통령감이라고 추켜 세우시던 외삼촌, 이모님들의 칭찬을 들으며 그 기대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학중이’로 성장했다.
계속, 반장과 4학년으로서 전교 학생 부회장에 당선되고 웅변대회에 나가 상과 트로피도 타오는 학중이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본인들의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목적이었지만 ‘우리 학중이’를 경기 중학교에 보내려고 서울로의 이사를 결정하셨다. 진주 공부는 공부가 아니냐고, 꼭 서울로 가야만 자식 공부시키냐고, 여자가 나서서 너무 까부는 것 아니냐고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서울행이라는 어머니의 결심만큼은 꺾을 수가 없었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 무리를 해서 사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지만 지방 공부와 서울 공부와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처음 받아온 성적표의 석차는 꼴찌에 가까웠고 우리 때부터 중학교 무시험 제도가 시작되어 ‘경기 중학교 입학’라는 어머니의 꿈도 무산되고 말았다.
중학교 때의 성적은 다시 상위권으로 회복됐지만 초등학교 때 반장을 해 봤던 사람을 중학교 때 반장으로 임명하고 1학년 때 반장 해 봤던 학생을 다시 2학년 1학기 반장으로 추천하는 관행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와 2학년 1학기 때까지는 별로 주목을 받질 못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2학기, 자유선거에서 반장으로 선출되고 3학년 때는 다시 전교 학생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어머니의 ‘우리 학중이’ 자랑은 다시 ‘부활’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모님이 그렇게 고대하던 ‘경기 고등학교 합격’의 꿈은 성적이 뒷받침을 못해 주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줄곧 반장과 전교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어머니, 아버지의 ‘우리 학중이 서울대 합격’ 의 꿈은 다시 되살아났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서울대 입학이라는 중압감은 날 두 번씩이나 산사로, 출가 아닌 가출을 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홀로 되신 어머니에게 날벼락 같은 충격이었다. 큰 말썽 한 번 피우지 않고 착실하기만 하던, 오로지 어머니 삶의 목표요 이유였던 아들이 쪽지 한 장 안 남기고 가출을 해 버렸으니…… 내가 보낸 편지의 ‘합천’이라는 우체국 소인을 단서로 전국을 수소문하여 해인사에서 날 발견하신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착한 아들은고 3때 다시 화엄사로 가출을 해 버려 어머니의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어릴 때는 속 한번 안 썩이던 녀석이 평생 썩일 속을 크게 두 번에 나눠 애간장을 다 태웠다고 어머니는 늘 얘기하시곤 한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에 실패하여 방황하는 나를 큰 형님이 자기 일을 도와달라는 명분으로 잡아주었다. 그러나 제대를 하고 직장으로 복직한 막내 아들만 대학에 못 보낸 어머니의 한은 커져만 갔다. 가장 큰 기대를 한 아들을 대학에 못 보냈다는 자책감을, 지나친 부모의 기대가 자식에게 오히려 짐이 됐다는 죄스러움으로 자주 표현하시곤 했다.
그 후 회사를 그만 두고 영국으로 건너가 대학 공부를 시작했고 다시 복귀한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어렵게 대학원을 마침으로써 막내 아들을 대학에 못 보낸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렸지만 막내 아들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컸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이 된다.
㈜대교출판과 ‘눈높이’ ㈜대교의 대표이사로 근무하는 동안 어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돌릴 만하자 ‘학중이’는 또 한번 어머니의 가슴이 쿠웅 내려앉는 사건을 만들었다. 대표이사직을 내놓고 회사를 그만 두겠다는 나에게 ‘세상 뜨거운 맛을 아직 네가 못 봐서 그렇지’ 하시며 한숨을 내쉬셨다. 어머님의 걱정은 가정경영연구소를 연착륙시키며 해소해 드리긴 했지만 한 번 놀라게 하면 큰 사고(?)를 치곤 하던 아들이 오늘의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학중이, 우리 학중이’라는 칭찬과 격려 때문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고졸’이라는 학력의 젊은 나이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대졸, 대학원 졸업의 쟁쟁한 임원들을 통솔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이 심어 주신 ‘학중이, 우리 학중이’라는 자부심 덕분이었고 대교의 상무이사직을 버리고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다시 대학 공부에 도전할 수 있었던 용기도 부모님의 격려 덕택이었다.
15000여 명의 직원에 6000억이 넘는 매출액의 작지 않은 회사를 무리 없이 경영해냈고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정’과 ’가족’이라는 주제를 붙잡고 돈이 안 되는 연구소를 5년 가까이 끌고나온 고집도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 하면 난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부모님의 ‘학중이, 우리 학중이’라는 칭찬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부모님의 사랑 못지 않게 중학교 때의 J 선생님, K 선생님 등, 선생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는데 초등학교 때의 P선생님과 고등학교 때의 C선생님은 더더욱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서울로 전학 간 제자에게 문제지를 부쳐 주고 문제를 풀어서 보내 드리면 채점까지 해서 다시 제자에게 보내 주셨던 P선생님, 친구들의 편지를 받고 싶다는 한 마디에 반 친구들 전원의 편지를 한 보따리 부쳐 주셔서 날 감격하게 만드셨던 P 선생님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스승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화엄사로 다시 가출하여 기말고사를 보지 않아 졸업을 하기 어려운 학중이를, 담당 과목 선생님께 일일이 사정을 말씀 드리고 인정 점수와 추가 시험을 보게 하여 졸업을 시켜 주셨던 C 선생님은 내 인생의 은인임에 틀림없다.
난 안다. 칭찬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칭찬에 관한 단행본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칭찬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칭찬경영이 경영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기 훨씬 이전부터 난 질책과 지적보다 칭찬과 격려가 직원들의 행동 교정에 더 효과적임을 알았다. 지각하고, 보고서 늦게 내고, 술 마시고 결근하는 직원들의 행동을 언성 높여 나무라고 무안 주고 인사고과에 반영하겠다고 위협(?)하는 것보다 일찍 일찍 출근하고, 보고서 제때 제때 내고, 야근을 하고서도 연장근무 자원할 때, 고맙다고 인사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것이 열 배, 백 배 효과적임을 난 벌써 알고 있었다. 장점과 강점을 자꾸 키워 주고 발전시키면 단점과 약점은 무시해도 좋을만큼 작아져 버리기에 우리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쪽으로 집중해야 함을 일찍이 간파했지만 실천이 따르지 못 하는 때도 많아 내 자신을 자주 되돌아보곤 한다.
그리고 난 내 자신을 칭찬하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 자신을 칭찬한다는 것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매한 동기에 호소하고 기대 이하의 행동에는 내 자신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거울을 보며 ‘학중아, 너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니? 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네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라고 설득을 하거나 ‘야, 학중아 애썼다.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마셔라, 학중아 수고했다. 너 좋아하는 연극이라도 한 편 보여 줄게. 같이 갈 사람 없으면 어떠니? 학중이가 보고 싶어 하는데……’라고 격려를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며칠 전 아들 녀석에게 얼마 남지 않은 대학 입시, 인터넷이나 TV에 너무 많은 시간 뺐기지 말고 고3으로서 마지막 최선을 다 하라는 요지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가 무안을 당했다. 아빠는 늘 그런 얘기할 때만 문자 메시지 보내는 것 같다는 지적이었다. 난 아들 녀석에게 바로 사과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다, 앞으로는 칭찬과 격려, 감사의 글도 자주자주 보내겠다’는 메시지를 날렸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그렇다고 그렇게 미안해하실 정도는 아녜요’라고.
그렇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수없이 반복한다. 깨우지 않아도 잘 일어나고 스스로 알아서 인터넷 사용 시간 절제하고 귀가 시간 잘 지킬 때는 아무 말도 않다가, 늦잠자고 안 일어나면 야단치고 인터넷 너무 많이 한다고 나무라고 귀가 시간이 왜 이리 늦느냐고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 자기 주장을 좀 강하게 펴는 아이들을 무조건 건방지거나 버릇없는 녀석들로 매도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주장하다가도 어느새 ‘부모’라는 카드를 들이밀며 명령, 지시, 비난, 평가, 비교, 협박,훈계를 일삼진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그러나 칭찬에도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자녀든 직원이든 내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기술이나 요령으로 칭찬을 이용하면 부작용이 심각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한 얄팍한 수단으로 칭찬을 남용하기 전에 미리 ‘신뢰’라는 탑을 정성들여 쌓아야 한다. 믿음이 생기기 전의 성급한 칭찬은 오해를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관심과 끊임없는 사랑, 그리고 진심어린 칭찬은 놀라운 변화, 기적 같은 변화를 낳는 비결이라고 믿고 있다. 이제 부모님이 물려주신 ‘학중이, 학중이, 우리 학중이’의 태도를 우리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서도 더욱 열심히 강화해야겠다.
[필자] 강학중(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출판사 : 21세기 북스) P.178 - 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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