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대화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을 위해 지난 여름, TV와 컴퓨터를 치워버렸다.
컴퓨터 사용 일지를 쓰게 하고 꼭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은 신문에 동그라미를 쳐 두었다가 그 프로만 보기로 한 약속이 번번이 지켜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일로 지적이 반복되니까 부모 자식간의 관계만 껄꺼로와져서 뭔가 구조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TV는
싸서 창고에 넣어버리고 인터넷선은 해지를 했다. 물론 아들 녀석이 제안한 조치는 아니었지만 대학 갈 때까지는 따라 주겠다고 해서 고마웠다. 그
대신 주말에 두어 시간, PC방에 갈 수 있는 용돈을 더 주기로 했다.
아내와 딸 아이의 의견도 물어보고 함께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들 없을 때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을 잠시 보면 안 되느냐는 아내를 애써 말렸다.
여름방학이 되어 시간은 더 남아도는데 TV와 컴퓨터가 없어지자 아들 녀석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건지 대단히 무료해 했다. 자신도 동의는 해 놓고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나에게 원망어린 투정도 했지만
미안하다. 하지만 조금만 참자는 얘기로 아들을 달랬다.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 그리고 가끔 내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1주일, 2주일을 넘기자 조그만 변화가 서서히 나타났다. 집안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지면서 다들 뭐 하나 싶어 돌아보면 모두 다 뭔가를 읽고 있었다. 책이나 신문, 잡지 등...... 그리고 음악 소리가
들리고 가족간의 대화가 살아났다. 각자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에 모든 눈과 귀를 다 뺐겼을 때 잃어버렸던 가족간의 대화를 다시 찾은 것이다.
밥그릇을 비우기가 무섭게 TV 앞으로 달려가던 아이들이 식탁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책을 읽다가도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가족간의 대화가
그칠 줄을 몰랐다. 딸 아이는 구석에 쳐박아둔 CD를 몽땅 꺼내 놓고 이렇게 좋은 음악을 안 듣고 뭐했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 했고 신문을
뒤적이며 한자를 물어보기도 하고 시사 문제로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물론 TV와 컴퓨터를 치워버린 조치가 최선의 방법이 아님을 난 안다.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골라 보거나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을 잘만 활용할 수 있다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TV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했고 TV 없는 세상의 더 소중한 즐거움을 맛보았으니 좀더 균형있는 삶, 보다 여유있는
삶을 아이들이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조그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아이들에게 뭔가를 얘기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내 말이 너무 길어진다는 점이었다. 대학생인 딸 아이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빠는 매사를 아빠가 하는 일과
연관짓는다. 아직도 어린 우리에게 너무 성급하게 결혼, 부부, 가족 문제를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대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결혼과 가족을
가르치면서 정작 내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것을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빠가 욕심을 좀 부렸나보다고 사과를 했지만 나의 대화 방식을 반성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지나치게 내 관심사만 얘기하고 모든 것을 내 전공과 결부시키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은 편인데 유독 우리 아이들에게만 심했던 이유를 내 나름대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세상의 이치를, 너무 빨리,
너무 많이 깨우쳐 주려고 했던 부모의 욕심이었다. 어떤 것은 자기 스스로 겪어 보고 시행착오를 해 보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세상 이치를 너무
서둘러 많이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분히 내 관점에서 나의 가치관을. 일상적인 대화의 즐거움을 잠시 잊고 지나치게 교육적인 면만을
강조했던 나의 잘못을 되돌아보며 이제 우리 아이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더 많은 얘기를 나누어야겠다고, 그리고 그들의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엄마, 아빠와는 얘기가 안 돼라고 마음의 문을 닫기 전에 이렇게라도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부모 자식간의 대화가 끊겨 문제가 커지는 사례들을 많이 알기에 아내에게도
수시로 당부하는 얘기가 있다. 무슨 얘기든지 좋으니 아이들이 집에 오면 뭐라고뭐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자고. 애들이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는 지나친 허용은 곤란하지만
그들의 관심사와 고민, 욕구를 귀담아 들어주고 부모의 생각과 느낌을 얘기해주는 수용의 태도만 잃지 않아도 많은 불행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여름 휴가 때, TV와 컴퓨터 없는 세상 덕분에 난 책을 무려
10권이나 읽을 수 있었다. 독서삼매경에 푹 빠진다는 느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가장 알찬 휴가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TV없는 날을 1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TV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깨닫고,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간의 대화가 되살아나는 가슴벅찬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 강학중(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프로의 눈 2002년
9,10월호 강학중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