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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믿고 기다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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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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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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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믿고 기다리기
월드컵 열기로 전국이 들끓던 6월 중순, 대학생 아들이 아버지와
친할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무시하고 야단만치는 명문대학 출신의 교수 아버지를 살해하고 인기척에 놀라 뛰어나온
친할머니까지 살해한 후,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불까지 지른 범인은 다름 아닌 친아들이었다.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귀국한 아들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몇차례 대학입시 에도 실패하면서 군 입대를 앞두고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유학 중인 두 동생
뒷바라지로 1년간 외국에 나가 있던 어머니의 부재 중, 부자지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짧은 신문기사 뒤에 감춰진 진실을 짐작하기가 어려웠지만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끔찍한 사건이었다.
‘부모 노릇 제대로 못하면 자식 손에 죽겠다’는 누군가의 씁쓸한 농담에 뭐라고
대꾸조차 할 수 없었지만 정말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인 것 같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일이잖니” 사랑과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식들의 삶을 내 방식대로 재단하고 조종하고 강요하고 질타한 건 아니었는지, ‘가정교육’과 화풀이를 혼동한
적은 없었는지, 반성할 일이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 주었노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그 눈물겨운 ‘사랑’과 ‘관심’이
자식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지를 헤아리는 지혜도 있어야 할 터인데 ‘잉태된 불행’을 짐작조차 못하는 부모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한때
아이들의 영어 발음을 위해 혓바닥 밑 절개수술이 유행한다는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애들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뒤진다는
강박관념으로 ‘빨리빨리, 미리미리’ 배워두는 선행학습 열풍 때문에 소아정신과를 찾는 어린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학습강박으로,
5∼6세밖에 안 된 어린이들에게 끊임없이 학원을 순례하게 하고 이제는 ‘종교’가 되어버린 영어를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정작 아이들에겐
‘지옥’을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다.
아내구타와 아동학대 문제도 여전히 사회문제로 남아 있지만 요즈음 소아정신과에는 부모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찾아오는 어린이들이 많다고 한다. 실제 때리지는 않지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위협적인 행동과 흉기로 협박하는 자식 앞에서 부모는
극심한 무력감, 우울증, 좌절감, 수치심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둬? 내 자식만큼은 누구보다 번듯하게 잘 키워서 자랑하고 싶은 과시욕,
끊임없이 다른 집 자식과 비교하며 성적과 ‘일류’에 매달리는 집착, 내 아이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부모의
환상과 착각,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나친 기대, 세상의 이치를 너무 많이, 그리고 빨리 알려주려는 조급함, 자식들을 결국엔 익사시키고 마는
과잉보호…. 이제 이런 것들은 과감히 버려야 할 때다.
그리고 부모가‘어떻게 할 수 있는 것’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헤아려 내 의지 밖의 일은 겸허히 수용할 줄 아는 넉넉함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우리보다 결코 배운 것이 많지 않았고 사는 형편이
넉넉지 않았음 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반듯하게 키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양육 방식은 폐기되어야 할 ‘무식’으로 밀리고 대체할 만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지도 못한 요즈음의 현실은 가정교육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가족 밑에서 부모가 못 다한 공백을 친족들이 보완해 주었던 과거와는 달리 ‘부모됨’을 잘 모르는 부모 밑에서
방치되고 잘못 인도되는 자녀들의 장래는 또 다른 불행의 세습을 예고하고 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진정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린 다음, 그들을 내 자식이 아니라‘강시내’씨, ‘강바다’씨로 어른 대접을 해 주자고,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을 일깨워 주자고 긴 얘기를 나눴다.
청소년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자녀교육을 위해 부모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그렇게 물었더니 한 마디로 ‘좀 내버려 두라’ 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좀 내버려두자. 그리고 그들이 정말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주고 믿자, 진득하게 기다려 주자, 주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면서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이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도록 지켜보면서 그들이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라고 느낄 수 있는
효과적인 사랑 방법을 다시 배우자.
[필자] 강학중(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주)대교 사보[프로의
눈]2002년 7,8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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