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 보집뻐요."
" 아빠, 아빠! 보집뻐요! " 어눌하게 떠듬거리며
아빠가 있는 "영국에 가고지뿌다"는 3살짜리 아들녀석의 목소리에 쌔애하는 바람이 가슴을 때렸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아빠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아빠가 없었다" 며 말끝을 흐리는 딸아이의 젖은 목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2년전, 내가 영국에 유학가 있을 때 아내가
보내준 카세트 테이프를 모처럼 가족과 함께 듣던 중이었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시절, 내가 아내에게,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존재였나를 진지하게 생각했던가 싶어 부끄러웠다.
지금은 가정이나 가족을 연구하는 입장이지만 나 역시 결혼의 의미도 모르고
결혼했고, 아이는 여자가 낳는 일, 집안 살림은 아내가 알아서 다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무지한 남자였다. 부모됨의 의미, 남편의 역할도 잘
모르고 생활비만 갖다 주면 많은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다고 착각했고, 가정경영연구소장으로 평등부부와 바람직한 부모상을 떠들고 다니면서도 이론과
실제는 별개라는 변명으로 나를 합리화시켜 온 것은 아니었을까? 아내가 가사분담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내 일을
챙기지도 않았고 아빠로서도 모범이 아니었던, 생각이나 말로만 좋은 남편이었지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두 아이를 낳아주고 그 아이들을 고3, 중3의 믿음직한 아들, 딸로 키워 주었으며, 묵묵히 집안을 가꾸며 참아주고 기다려
주었다.
오늘 문득 아내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느낀다. 고개숙인 남자나 간큰 남자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몹시 쓸쓸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더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쪽은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권 신장이나 바람피우는 여성들의 얘기로 세상 말세라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우리 주부들은 여전히 알뜰한 살림꾼이며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다만
한가지, 남편이 바람피우면 맞바람 피고 뺨 한대만 맞아도 이혼을 주장하고 시부모님 모시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여성이 의식있는 여성이라고
착각하거나, 아이들 돌보고 남편 뒷바라지 하며 가정을 지키는 보람과 즐거움으로 사는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풍조가 염려스러울 뿐이다.
힘들여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들 못지 않게 우리의 가정을 지켜온 일등 공신은 이 땅의 주부들이다. 이제는 좀 더 당당해지자.
무조건 참고 맹목적으로 희생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이제 내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그때그때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배우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내 자신을 챙기고 보살피고 가꾸자. 풍성한 수확의 가을이 저만큼 와 있다.
(주) 에넥스 사보
향기나는 부엌 2000년 가을호에서 발췌
[필자] 강학중(가정경영연구소 소장) [출처] 에넥스 사보 200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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