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움켜쥐려고 하고 높아질수록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러나 한창 IMF가 터졌을
무렵 (주)대교 사장직을 스스로 버리고 ‘컴백홈’을 선언한 뒤 가족과 함께 걸어서 국토를 횡단했던 강학중씨. 이후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아예 가정경영연구소를 차리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 그의 내실있는 이야기.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답게 그는 먼저 아내와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선 인터뷰한다고 집에서 만나 가족이 들러리로
사진 찍어야 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고 했다. 잘 나가던 회사의 사장직을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간 그에게 세간의 관심이 쏟아졌고 얼결에 인터뷰를
하는 강학중씨(43) 곁에서 사진을 찍혔던 아내와 아이들이 얼굴이 알려지는 바람에 머쓱하고 불편해서 혼났다 는 항의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가족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그의 거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미 잘 알려진 얘기라 식상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기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강학중이라는 사람의 현재를 얘기하려면 지난 시간들의 행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그가 한 일은 다른 사람들의 잣대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창 IMF 입김이 거세던 98년 12월 강학중씨는 (주)대교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자신의 이름 뒤에서 지워버렸다. 한순간에 내린 결정이
아니고 1년여의 준비기간을 두고 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무슨 극적인 사건이라도 생겨서 그만뒀다면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람들은 중년을 그냥 ‘살아지는’ 나이쯤으로 생각하지만 사춘기 못지않게 중요한 시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재정비해야 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통 시간이 나지 않는 거예요. 업무량은 절대적으로 많고 아무 생각없이 일에 치여서
돌아가는 나 자신이 싫었습니다.”
늘 바빠서 제대로 집에 있어본 적이 없는 남편을 두고 아내는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물어왔다. 아이들은 언젠가 외식자리에서
아버지가 뭘 해줬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봤더니 ‘제발 아빠하고 밥 좀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 얘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이 났다.
아내에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선뜻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당신이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동의를 해주었다. 아이들은 늘
아버지가 너희들이 정말 원한다면 그것을 하라고 가르쳤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이면 우리도 좋아요’ 라고.
물론 다른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은 힘이 들었다. 나이드신 어머니의 걱정도 그렇고 그때까지 밑에 두고 아껴주었던 형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형이 강학중씨의 사표를 수리하기까지는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후임까지 결정하고 난 다음 드디어 그는 훌훌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짐을 꾸려 가족 모두가 14박 15일의 여행길에 나섰다.
딸은 고등학교 입학을, 아들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자신은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 선 시기 였다. 가족 모두 중대한 시기를 맞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날을 준비하자는 의미에서 떠난 여행길 이었다.
실업 2년여만에 문연
가정경영연구소
길을 나선 강학중씨 가족에게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달게만 느껴졌다고 했다. 걸어서 다니고 잠은 민
박집을 골라 한방에서 자고 고생을 자처한 여행이었다. 평소 전혀 그럴 기회가 없었던 가족은 한 방에 서 뒹굴고 자고 밥먹고 하면서 서로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됐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에게 중요 한 행사였던 졸업식과 입학식을 네 번 다 지켜볼 수 있었다.
결혼해서 사는 동안 외국으로 연수받으러 다니기도 하고 그러느라 이사를 16번이나 다녔는데 한 번 도 아내를 도와주지 못했다. 쉬는 동안
제대로 이사를 도와줄 수 있어서 그동안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봄에 돋아나는 새순을 들여다 볼 여유도 생겼다. 산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한 실업’이었다고는 하지만 회사를 나오기 전에 미리 자신이 할 일을 정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 다. 막연하게 가정과 관계된 일이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어도 밑에서 치받고 들어오는 후배들을 걱정 하는 일을 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은 정도였을 뿐이다. 2년 동안은 충분히 쉬면서 다음
일을 결정하 기로 했지만 막상 사표를 내고 집에 들어앉은 다음날은 아침에 나갈 데가 없다는 것이 참 어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줄 명함이 없다는 것이 불편했다. 무슨무슨 직함이 그 사람의 대 부분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어른들이
건네주는 명함에 빈손으로 답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마침 터진 IMF 때문에 집에서 전화받기도 곤혹스러웠고 아파트 수위 보기도 껄끄러웠다.
언젠가 KBS 라 디오 방송에 출연할 일이 있어서 방송국에 갔더니 수위가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데 대답할 말이 궁했다. 얼결에 ‘집에서
왔습니다’고 대답을 했더니 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마침 마중나온 구성 작가 때문에 그 자리를 모면하긴 했지만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까지
나더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고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던 강학중씨는 책읽고 강의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가정과 관계되는 일을 찾았다.
99년 6월 서울 인사동에 사무실을 얻고 가정경영연구소(www://home21.co.kr)라는 간판을 내걸은 것. 9월에 직원 2명이
들어왔고, 2000년 1월 1일은 ‘공식적으로’ 사무실 문을 연 날이다.
김인수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문용린 교육부장관, 한준상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박금자 산부인과 원장, 최은순 변호사 등 각계인사
17명으로 자문위원단을 구성했다.
가정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하고 이미 연구가 되어있는 프로그램들을 가정에
공급하는 역할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만든 것이 가정경영 연구소다.
새 밀레니엄 시작과 함께 출발한 직원 2명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그가 택한 새로운 삶의 주제는 가정이다. 강소장은 지금 사람들이 투자해야 할
곳은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IMF 이전 다들 초고속 성장을 외치고 있을 때 그는 좀더 천천히, 그러나 차근차근 다져가며 가기를 원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회의 중심은 가정이고 가정은 부부관계가 출발점이자 핵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꼭 양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는 가정, 그런 가족형태만이
올바른 가정의 모습 이라는 생각에는 절대 반대한다. 단지 가족의 핵이요 출발점인 부부 문제에 우선 순위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법을
배우자는 얘기다.
가정에 대한 편견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
“사람들은 결혼하기 위해서 뭘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해요. 그저 만나서 결혼하고 살면 되는
것이 가정인줄 알고 있지요. 하지만 어디 그런가요. 사람이란 본래 자기하고 다른 사람한테 끌리기 마 련인데 일단 결혼생활을 하게 되면 상대를
자기한테만 맞추려고 애쓰거든요. 그리고 상대가 틀렸다고 말하죠. 그래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시집과 부딪치는 문제, 임신, 출산 이런
것들이 얼마 나 큰 사건들입니까. 미리 배우고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준비할 시간을 가진다면 서로 달라서 생기는 문제들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지
않겠어요?”
강소장은 행복한 가정을 위해 가정경영연구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4가지 분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우선 강연 등을 통해 교육을
하고 7월부터는 사이버 부부상담을 할 계획이다. 물론 앞으로는 전화나 면담을 통한 상담도 계획하고 있지만 준비가 많이 필요한 일이라 우선 사이버
공간에서 상담을 하려고 한다.
사이버 공간은 익명이 보장되고 자신과 비슷한 경우의 사람이 상담했을 경우 그 상담 내용을 자신에 게 적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학문적인 내용이나 딱딱한 주제는 가볍게 다루어 일반인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만한 책도 출판할 계획이다.
그리고 부부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들도 계획하고 있다. 얼마전에 있었던 부부모임은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진작가들을 초대해
부부 사진을 찍어주는 프로그램은 특히 인기를 모았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들의 모습을 홈페이지에 올려놓기도 했다.
강소장이 계획하고 현재 실행해가고 있는 이 모든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적지않은 연구와 비용이 들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경제적인
문제에도 느긋한 편이다. 이미 계획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는 수익은 전혀 없고 투자단계지요. 앞으로 3년간은 그럴 겁니다. 배우고 익히는 단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싶어요. 그 이후에는
들어오고 나가는 돈이 제로 상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을 크게 남기겠다고 생각했으면 이 일을 못했겠지요. 가정이라는 이름을 내건 연구소들은
많이 있지만 민간인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는 곳이 없는 이유도 크게 돈될 일이 아니라서 그럴 겁니다.”
따라서 전에 누리던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박’하게 살고 있지만 그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 오히려 일하는 기쁨을 새록새록 느끼고
있다. 대교에서 일할 때도 물론 즐겁게 일하기는 했지만 일하는 것이 기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었다.
동성애자 가정도
인정해야
그는 요즘 경희대학교 가족학전공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재미에도 흠뻑 빠져 있다. 가정대학
이라 남자라고는 그 하나뿐이어서인지 어린 친구들은 늙은 학생이라도 왕따시키지 않고 매점에 밥먹으러 갈 때도 곧잘 끼어준다. 2천4백원이면 네
사람이 맛있는 라면에 커피까지 마실 수 있는 생활이 무척 행복하지만 이수해야 할 학점수는 만만치가 않다.
강소장은 편부모라는 말대신 한부모를 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편부모라는 말 속에는 사람들이 정한 가정의 규범에 안맞는다는 사회적 편견이
가득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양쪽부모가 다 같이 있어야 바른 가정이라는 설정은 요즘 시대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이란 이제 더 넓은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 사별한 가정도 있고 재혼도 양쪽 이 재혼인 가정, 한쪽만 재혼인 가정,
아이가 있는 재혼가정, 없는 재혼가정 등 모두 다르다. 혼자 사는 독신가정도 있다.
동성애자들끼리의 삶도 한 가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강소장의 주장이다. 이렇게 가정의 의미를 확대시켜야 그동안 좁게만 생각해왔던 가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이 가능하다. 소년소녀 가장도 그런 의미에서 다른 말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주장한다.
강소장은 먼저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보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길게 잡은
그의 인생 여정을 보면 지금부터 10년 정도는 기초를 닦는 기간 이다. 우선 가족학 박사 공부를 마치고 남은 인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짜나갈 생각이라고 한다. 인생을 길게 잡고 넉넉하게 일을 추진해 나가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큼은 앞으로 더 살 수
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70세까지는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에 푹 빠지고 싶다고 한다. 무언가 사회를 위해서 보람되게 살 아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그후
5년간은 그동안 해온 업무를 다음 세대에 인계하는데 투자할 셈이다. 마지막 5년은 살아온 길을 총정리하면서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한다.
느긋하지만 건 강하고 활력이 넘쳐보이는 그의 인생계획을 듣고 있자니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그에게서 삶의 여유와 행복을 느끼는 마음을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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