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그 정도의 불편은 견딜만했다.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서울에서 동해 까지 걸어서 14박 15일간의 가족여행을
떠났다. 발목을 다쳐 침을 맞아가며 강행한 고된 여행이었지 만 꼬박 보름을 함께 하며 확인한 가족간의 끈끈한 정, 밥 한 공기와 따뜻한 잠자리의
고마움 그리고 침값을 굳이 안 받던 어느 한의사의 푸근한 인정까지, 행복해진다는 것이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들어가는 딸과 아들 녀석의 졸업식과 입학식에 네 번 모두 참석해서 새 출발을 축하해 주었고 결혼하고 열 여섯번 째의 이삿짐을 제대로 도와줄 수가
있어 아내에게 조금은 덜 미안했다.
1997년 12월 31일,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를 못했다. 회사를 그만 둔 극적인 사건이나 계기를 예상했던
사람들에게 괜찮은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를 마다하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은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재하고 회의하고 사람만나고 행사에 참석해서 한 말씀하고, 퇴근 후에는 또 다른 모임 등으로 일 주일 내내 늦는 때도 있었고 가족들과의
약속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당신은 남이 더 중요하느냐 는 아내의 항의와 아빠하고 밥 좀 같이 먹어 봤으면 하는 아이들의 얘기를 들었을 때가
내 나이 중년 이었다.
별 문제없이 꾸려온 회사 살림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 주고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해 보고 싶었다.
나이들어도 할 수 있는 연륜이 쌓이는 일, 가정과 일을 병행시킬 수 있는 직업,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가치있는 일, 그리고 책 읽고 글 쓰고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생각한 2년이 되기 전에 나는 그 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가정경영연구소를 만들었다. 회사를 그만 두고도 당장 생활비에 큰 압박감을 안 받도록 준비를 해 두었기에 가능한 결단이었고 그것을
이해하고 날 믿어준 가족이 있었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었다.
연구소 일로 바빠져서 가족들과의 시간을 내기가 다시 어려워지는 때도
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알기에 우선순위를 조절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된 셈이다.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로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살고 늘 즐겁게 산다면 그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배우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둘도 없는 유산이요 혼수감이요 보험이라고 믿는다.
내 일을 다시 찾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건강하고, 일과 가정의 균형에 일찌감치 눈뜬 행운으로 난 요즘 하루하루를 기쁨 속에서 살고 있다.
점심 먹고
사무실 근처 인사동 화랑을 한 바퀴 도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고 가족학을 공부하며 이론과 실제가 만나는 것을 확인하는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아버님이 지어 주신 기뻐할 학, 가운데 중, 그 이름에도 충실한, 매일매일을 기쁘게 사는 남자, 항상 기쁨 중에 있는
남자다.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매일매일의 연출자가 되어 삶의 여유를 찾게 해 준, 가정으로 돌아가자는 나의 결정에 후회는 없다. 그리고 참
행복하다. 아직까지는.
< 샘터 7월호 >
[출처] 샘터 2000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