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승용차에 운전사, 비서까지 거느리며 잘나가던 회사의 대표이사. 어느날 홀연히 사표를
던졌다. 함께 밥먹는 것이 소원이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온 가족이 걸어서 동해로 떠났다.지치고 힘든 15일의 여정 속에서 서로의 존재와
사랑을 확인했다. 비로소 그도 가족이 됐다.주식과 부동산이 아니라 가족에 투자하라.
가정경영 전문가로 변신한 강학중씨(42)의
뜻깊은 귀가.
강학중씨(42)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고급승용차에 운전사, 비서를 거느리고 다녔다. 스무살에 형을 도와 눈높이(주)대교를 창업, 마흔이 채
안된 나이에 대표이사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가 어느날 홀연히 사표를 던졌다. 어머니와 형(대교 강영중 회장)은 “네가 아직 세상 뜨거운 맛을 못봐서 그렇다”며 결사반대했다. 그가
내건 이유라는 것이 `늦기 전에 나와 내 가족에 충실하고 싶어서인 데다 앞으로의 계획이라고는 `당분간 실업자 생활이었으니.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인사동에 간판을 하나 내걸었다. 한국가정경영연구소. 직원 단 2명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그가 택한 새로운 삶의
주제는 `가정이다.
“아직 시작은 미미해요. 1월1일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래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사회와 함께 나누는 정도죠”
연구소를 연다고 하니까 21세기를 앞두고 웬 가정이냐고 딱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차라리 재테크연구소나 차리라고 했다. 하지만
강학중씨는 지금 사람들이 투자해야 할 곳은 주식이나 부동산 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노숙자문제를 예로 든다. 노숙자 중 많은 수가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두고 가출한 가장들 이다. 직장을 잃었다고, 사업이
망했다고 왜 집을 떠나야 할까. 혹시 가족들의 마음 속에 그를 받아줄 공간이 없었던 건 아닌가. 아니, 그보다는 그가 일에 파묻혀
지내느라 가족을 위한 공간을 예비해두 지 않았던 건 아닌가.
강학중씨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사업이 한창 번창일로일 때 그도 늘 가족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아빠에게 가장
바라는 게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밥좀 같이 먹었으면 좋겠어요”
아내가 옆에서 덧붙였다.
“저녁 먹을 때마다 블라인드를 쳐요. 건너편 아파트에서 `저 집엔 아빠가 없나봐 할까봐”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후 첫번째 목표는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었다. 48평 아파트 를 전세주고 33평으로 이사하는 일을 아내와
함께 했고(결혼 이후 16번 이사를 했지만 그가 이삿짐을 직접 싼 것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딸 시내와 중학교 1학년인 아들 바다의
등·하교며 과제물도 챙겨줬다. 아내와 아이들이 마냥 좋아한 것만은 아니었다. 늘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가 집에 머물자 가족들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 했다. 그것은 자발적
실업자인 강학중씨에게 닥친 첫 시련이었다.
그는 시련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극복했다. 특히 지난해 1월2일 온가족이 함께 출발한, 집에서 동해까지 14박15일간의 도보여행은 새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잠은 여인숙이나 민박 에서 자고, 김치찌개 2인분 시켜 공기밥 2개 추가해 먹는 알뜰여행. 중간에 그의
발목이 접질려 절뚝 거리는 신세가 되자 아이들이 짐을 대신 져주기도 했다.
“난 그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늦지 않을 때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니까요. 처음엔 어려웠지만 어느 단계를 지나자 사랑의 실체가 보였습니다. 사랑이 담긴 얘기가 아내나 아이의 가슴에 심어져 작은 싹을 틔우는 느낌 말이에요. 어떤 보험보다 확실한
노후대비였죠. 게다가 덕분에 새 직업까지 얻게 되었으니 괜찮은 투자 아닌가요?”
2년 전 사람들이 그에게 “이제 뭐 할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말을 아꼈다. 섣불리 공수표를 남 발하기 싫어서였는데 그래도 집요하게
물어보면 “가정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그런 생각은 가족이 함께 떠났던 1년간의 영국유학에서 영글었고 지난 6월
귀국한 후 `가정경영연구 소라는 형태로 구체화했다.
그사이 홈페이지(http://home21.co.kr)를 열고 김인수 고려대 교수, 강준혁 추계예술경영대학 원장, 문용린 서울대 교수,
한준상 연세대교수, 박금자 산부인과 원장 등 17명으로 자문위원단을 구성 했다. 적지않게 들어오는 가족문제 관련 강연요청 때문에도 꽤 바쁘다.
또 가족에 관한 책이나 연구 논문을 열심히 공부중이다. 내년부터는 가족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려고 경희대 대학원에 입학도 해놓았다. 그런데
사실 연구가 중요한 건 아니다.
“좋은 연구 결과는 많습니다. 문제는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거죠. 연구는 흘러넘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냥 살아가요”
강학중씨는 가정에도 경영의 개념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아이 낳고 산다고 저절 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구성원간에
분명한 매출목표(예를 들어 몇년 내에 꼭 이뤄야 할 일)가 있어야 하고 목표를 달성했을 때는 인센티브(사랑이 담긴 격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 다 좋은 가정을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연구소 형태이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할 생각. 어디든 원하는 곳이 있으면 교육이나 상담을 해주고 특히 부부단위
행사를 많이 열고 싶다. 부부축제나 부부를 위한 여행 프로그 램, 부부 대화법을 가르쳐주는 전문강좌 같은 것. 3년 정도는 걸음마를 떼는 단계라
생각하고 일을 벌여나갈 작정이다. 사실 세간의 짐작과 달리 재정상태가 그리 넉넉한 건 아니다. 2년 동안의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던 데다
영국에서 출혈이 컸다. 생활규모는 예전에 비해 반 이하로 줄었고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하지만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도보여행 할 때 그랬어요. 시속 60㎞로만 달리다 시속 4㎞의 삶 을 새로 배웠다고요”
지난 가을 영국에 남겨둔 아이들에게 보내주려고 길에 떨어진 노란 은행나무잎을 주우면서 가슴이 찡했다. 강학중씨는 “그 느낌이 지금 나에겐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강학중씨의‘가정만들기 5계’
1. 자식에게 주는 가장 값진 유산은 여행이다.
공간적으로 함께 있다고 진정 함께 있는 게 아니다. 집이라는 공간 속에 모여 있어도 각자의 삶 을 살기 바쁘다. 그럴 땐 함께 여행을
떠나라. 자가용과 콘도를 버리고, 버스 타고 걷고 하면서 세상 을 체험한다. 15일간의 도보여행에서, 영국에서 틈만 나면 했던 유럽여행에서
강학중씨는 아이들과 의 관계에 큰 진전을 보았다. 평소 사랑을 표현하기 쑥스럽다면 여행이 좋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2. 자식이 커갈수록 부부중심의 생활을 가꿔야 한다.
뒷바라지하느라 온힘을 쏟고나면 곧 떠나가버리는 자식들. 빈 둥지에 남은 부부는 커다란 상실 감을 겪는다. 그러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란 다름아닌, 부부끼리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 자식에게 향하던 눈을 남편, 혹은 아내에게 돌려보자. 아이들 없이 둘만 할 수 있는
취미를 개발하고 단둘이서만 식사를 해본다.
3. 편부, 편모 가족도 가족의 한 형태다.
흔히 가족하면 남편, 아내, 자식으로 이루어진 형태만 생각한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가족도 포 기한다. 하지만 이혼가정이든, 사별가정이든,
미혼모가정이든 다 가정의 한 형태다. 어느 쪽이 우월하 다, 우월하지 않다는 식의 생각은 금물.
4. 아내에게 휴가를 주라.
가정의 중심에 아내가 있다. 아내는 365일 휴가도 없이 아내와 엄마로 살아간다. 그에게 1주일 에 한번이든 한달에 며칠이든 휴가를 주자.
아이들에게도 어머니의 소중함을 가르쳐줄 기회가 된다.
5.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냥 살아간다고 가정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각자 구성원이 가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해결방안도 함께 찾아보고
가족에 관한 책도 읽어본다. 예를 들어 존 그레이의 ` 여자는 차마 말 못하고 남자는 전혀 모르는 것들 같은 책은 결코 이해할 수 없던 배우자의
행동을 이해하게 해준다.
[출 처 ] 경향신문(991218) - being@kyunghyang.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