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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중씨의 아주 특별한 가족여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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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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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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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생각
대교 대표이사직 내던지고 가족과 함께 도보로 국토횡단 강학중씨의 아주 특별한 가족
여행기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서 박차고 나와 스스로 길을 걷고 있는 강학중씨(40), 불과 얼마전만 하더라 도, 그는 교육문화그룹으로 유명한
대교의 대표이사였다.
그는 한해의 시작을 가족과 함께 했다. 서울 대치동 아파트에서 동해역까지의 280km를 14박15일동안
도보로 횡단한 것.대표이사 자리는 보다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하고 이제는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들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남다른
생각을 들어봤다. 그룹회장 형님의 만류불구하고 20년 정든회사를 스스로 떠난 사연 "이거참… 이런 순간에 전 제가 백수라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명함을 교환할 때면 좀 머쓱해지거든요, 이번에 제 딸 시내와 아들 바다가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아빠 직업란에 뭐라고 써야 할지 물어올
때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요."강학중씨는 명함 대신 미소를 건넸다. 마흔 넘은 남자에게선 발견하기 힘든 웃음이었다. 억지로 연출 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심성 그 자체의 따뜻하고 푸근한 얼굴 표정에선 실업자답지 않은 여유가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가 실업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대치동46평 아파트를 내놓고 방이동 34평아파트 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 차액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다. 일과도 단조로워졌다. 두 아이를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일 정도가 하루의 중요한 일과다. 명태(명예퇴직)든 황태(황당하게 퇴직), 동태(꼼짝못하고 퇴직), 졸태(졸지에 퇴직)의
경우, 실직자들은 하루 아침에 거리에 나앉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강학중씨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소중한 가정의 품에서 정신없이 사느라
잃어버렸던 것, 하고 싶었지만 미처 못했던 것들을 후회없이 하게 됐다고 말한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미련 없었다. 고급승용차에
운전사가 딸리고 비서까지 둔 이른바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지금도 아주 잘한 선택으로 생각한다.강학중씨는
지난해 12월까지 ㈜대교의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교그룹 강영중회장과 함께 76년 학습지 사업을 시작, 대교를 유수의 교육문화그룹으로
일으킨 창업공신, 더욱이 회장의 동생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졌기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내에서 그의 입지는 막강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가
홀연히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았을 때 주위 사람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평사원에서 출발해 대표이사까지 오른 그 역시 20년 젊은 열정을
송두리째 바친 회사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회사에 대한 애정을 수치로 계량할 수 있다면, 아마 그는 회장인 형님에 이어
두번째는 될 것이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사훈이나 사시, 사가등의 작업도 직접 했기에 회사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 없기도 했던 것.
"모든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이 앉아야 합니다. 회사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자리를 지킨다면 조직에 누가될 뿐이죠. 제가
몸담았던 회사에는 저보다 더 유능한 인재가 많습니다. 회사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회사의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위해 그분들께 자리를 양보한 것
이지요."
강학중씨가 그런 결심을 한 것은 지난해 2월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어머니와 형님께 털어 놓았다. 한달 후
그는 다시 자신의 변함없는 생각을 전했다. 이번에도 어머니와 형님은 동의하지 않았다. 석달을 더 생각해보라는 것. 다시 석달이 흘렀지만 그는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역할까지 해온 형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저를 계속 붙잡는 건 편애입니다. 그 애정의 반만이라도
임원들에게 나눠주십시오. 나이나 학력, 능력 모든 것을 따져봐도 저보다 처질게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강학중씨는 지난해 7월 자신의 거취에 대해
후임대표에게 언질을 주었다. 이후의 기간은, 말하자면 인수인계의 기간이었다. 11월 공식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표명한 그는 12월 사표를 쓰고
정든 회사에서 나왔다.
강학중씨는 몇 년 전 자녀들에게 너희가 아빠에게 바라는게 뭐냐는 질문을 한 적 있다. 그때 아이들은 아빠랑
함께 밥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그때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 가족모두의 새출발 위해 도보여행 전진…희망과
사랑을 꼭꼭 싸담고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마침 딸 시내도 원하던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상황이었고 아들 바다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강학중씨가 먼저 가족들에게 국토횡단도보여행을 제의했다. 가족모두에게 의미가 담긴 여행이었지만 처음에는 반발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에게 힘을 주자라는 어머니 조경희씨의 말을 시내와 바다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크고,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의 성장을 보며 때로 감격스럽기도한 법이다.
98년1월2일 드디어 강학중씨네 가족의 힘찬 도전이 시작됐다.
대치동 미도아파트에서 시작, 하남-양수리-양평-용문-횡성-새말-안흥-평창-정선-여량-임계까지 동으로 동으로 갔다가 백복령 고개를 넘은 후
종착지인 동해역에 이르는 장장 280km의 여정이었다.강학중씨 가족은 추위와 폭설속에서 하루20km이상의 행군을 거듭했다.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했던 그 여정 중의 에피소드야 오죽이나 많으랴만 강학중씨 가족의 해프닝은 첫날부터 시작됐다.강학중씨는 당초 초반에는 일정을 짧게
잡았다고 한다. 처음부터 무리하며 많이 걷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때문, 그래서 첫날의 목적지는 팔당까지였는데 겨우겨우 도착한 팔당에는 마땅한
숙소가 전혀 없었다. 결국 첫날부터 오버페이스. 양수리까지 걸으며 무리를 하게 된 것.그 때문인지 둘째, 셋째날부터 심한 피로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셋째날 팔당에서 강학중씨가 발목을 접질러 절뚝이 신세가 됐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가장 앞장서 독려해야할 아빠가 가족
모두의 걱정과 동정을 한몸에 받는 존재가 되고 만 것. 그래도 체면상 포기는 할 수 없어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파스를 덕지덕지 불여가며 행군을
강행해야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침 맞으러 다니고 파스 사붙이느라 경리부장 임무를 맡고 있던 딸에게 구박도 많이 당했지만 오히려
가족과의 끈끈한 유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룻밤자고 나면 제 배낭이 가벼워져 있었어요. 아이들이 몰래 아빠의 배낭에서 짐을
덜어 자신의 배낭에 담아댔던거죠."강학중씨 가족이 하루에 사용한 돈은 평균8만원에서 10만원. 여인숙이나 민박은 서너군데의 가격과 시설을 비교해
가장 적은 비용에 적절한 곳을 골라 잠을 청했고, 김치찌개 2인분만 주문한 후 공기밥 만 두개 추가하는 식으로 아끼고 아낀 비용이었다.여행중에
마주친 좋은 사람들과 야박한 사람들도 잊을 수 없다. 회사 그만두고 가족과 도보여행하는 중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굳이 침값도 안 받고 등 떠밀던
한의사나 기름값을 아끼느라 보일러를 틀지 않아 아들 바다를 감기들게 한 민박집 아저씨. 모두가 기억나는 사람들.
그래도 역시 가장
기억나는 것은 제일 마지막 고비였다. 백복령 고개를 넘어 동해로 갈 무렵엔 모두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누구랄 것도 없이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혀
있었으며 강학중씨의 경우 출발 3 일만에 다친 다리의 통증이 이젠 무릎과 허리에까지 올라온 느낌이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좋지 않아 비가 왔다가
눈이 오기를 계속 반복했던 것 . 더욱이 날이 저물었는데 민박집마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무렵 반 거지가 된 그들의 모습을 본 한
할머니가 강학중씨에게 호통까지 쳐댔다. 내 자식이나 남 의 자식, 모두가 귀한 자식들 인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강학중씨는 결국 버스를
잡아타고 동해로 갔다. 그리고 가족을 따뜻한 곳에 눕혔다. 다음날 날이 밝자 강학중씨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버스를 잡아탔던 그 장소까지 가서
다시 마지막 여정을 도보로 이었다. 드디어 동해역, 모두가 환호성을 질러댔다. 동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그들 가족은 진심으로
하나되었음을 느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준비된 실업자의 행복비결 어려울 때 일수록 가정에 투자하라.. 가족과 함께 초긴축
도보여행을 다녀온 강학중씨가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앞으로의 진로와 연 관된 것이다. 그럴 땐 그도 대답이 주저된다.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머리속에서 뒤엉켜 맴돌기 때문이다. 강학중씨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전제로 회사를
그만둔게 아니다. 남은 삶 동안은 자신과 가족에 충실 하겠다는 막연한 계획이 전부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요즘 그의 계획은 좀더
구체적이 되었다고 한다. 우선은 아이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것. 그 계획은 많이 달성됐다.
다음 계획은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겠다는 것이다. 성당에도 좀더 열심히 나가야겠다는 결심도 있다. 또 하나는 기타를 배우는 일이다. 합리적이고 겸손한 그의 퇴직은
임원들에게도 아쉬움이었다. 그래서 임원들은 퇴임을 앞둔 그에게 가장 갖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데 노래에 맞춰 반주할 수 있는 기타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래서 그에게 기타가 하나 생겼다. 스스로 반주하며
노래할 수 있도록 기타 실력을 쌓는 것이 큰 목표다. 그는 등산에도 취미를 갖기 위해 산악학교에도 나가볼 생각이다. 전문가 실력정도는 아니더라도
사진도 좀 배우고 싶단다. 연기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그는 자신이 감정표현에 서투르다고 말 한다. 때문에 점잖다라는 이야기도
듣지만, 몇몇 친구들로부터는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는 것. 연기를 공부한다면 감정을 시원하게 표출할 수 있으리라 그는 기대하는 것. 자
어떠한가?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그래도 무슨 계획이 있으니 그 좋은 자리를 그만두지 않았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의
계획을 들었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내용이다. 그러나 그게 강학중씨에겐 더없이 중요한 계획이다. "절대 시간이나 주위의 시선에 쫓기고 싶지
않습니다. 압박감이 있다면 잘못된 결정을 내릴수도 있으니까요. 백지 상태에서 2년 정도는 하고싶은 일을 하며 제 일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수입이
없어서 어떻게 생활하냐구요? 그래서 아파트평수도 줄였고 생활비도 대폭 줄였습니다. 전 넉넉한 시간과 화목한 가정을 통해 오히려 삶의 질이
예전보다 더 향상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얼마전 아파트를 옮기며 강학중씨는 이사가 그렇게 힘든건줄 몰랐다고 한다. 이사도 여러
번 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이사와 관계된 모든 일이 지금까진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고, 짐을 싸고 푸는 것도 큰 일이지만, 자녀들 학교문제를
알아보고, 전화나 각종 고지서 변경하느라 이리저리 드나들고 전화 하는게 보통일이 아니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서툰 일솜씨 때문에
아내가 타박할 때마다 당신은 16년 경력의 베테랑이지만 나는 이제 초보자니 좀 봐달라라는 통사정과 함께.
준비된
실업자 강학중씨.
IMF시대를 사는 고개숙인 가장들을 위해 그에게 한 말씀을 청했다. 이에 그는 혹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절대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십시오. 부업이나 주식,
부동산 투자 등으로 한꺼번에 큰 돈 벌려는 생각보다 가정이나 자식들에게 투자하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더 빛나는 가치는 바로 가정의 화목과
신뢰이고 가족간의 대화와 사랑입니다.
강학중씨는 넘치는 시간이 재산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한다. 그동안 못해본 것들과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 어떻게 보면 그 일들이 정말 더 소중한 일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학중씨가 사랑하는 아이들인 시내와
바다는 오늘도 수업이 끝나면 아빠에게로 달려갈지 모른다. 기타를 들고 애창곡 제비를 소리높여 부르고 있는 아빠가 있는한 한층 좁아진 아파트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출처] 97년 3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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