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굴지의 출판기업 사장자리 내놓고 가족과 함께 도보로 횡단한 강학중.
모두들 직장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마당에 사장자리를 버리고 나를 찾아 나선이가 있다. 연간 매 출 5천3백억원 규모의 대교㈜ 前사장 강학중씨다. 불혹의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하는직책을 버리고 이 남자가 새롭게 찾으려는 것은 뭘까. 그는 최근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15일간 걸어서 국토를 횡단 했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 보래이! 니가 아직 세상 뜨거운 맛을 못봐서 그러능기라." 어머니가 대노 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돈과 지위, 게다가 명예까지 한꺼번에 보장되는 사장 자리를 내놓겠다니, 부도가 난 것도 아니고 잘 나가는 회사의 사장 명패를 스스로 거둬
들이다니, 그건 상식만으로는 납득 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식회사 대교. 국내 굴지의 출판기업, 연 매출5천3백억원… 강학중씨(40)가 이런
규모의 회사 사 장자리를 스스로 내놓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납득이 안 간다는 반응이었다.
"작년 2월말 어머님과
형님(대교 회장 강영중씨)에게 처음 얘기했더니,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보라며 반대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맞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저도 제 방식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더 생각해 보라며 몇 개월의 시간을 주셨지만 저의
결심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정리 과정을 거쳐 작년 12월 말 회사를 떠났습니다.
" 강학중 씨가 20년간 땀으로 일궈왔던 회사를
떠난 이유는 뭘까.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간의 암투?…이런 문제 라면 납득하기가 쉬울 것이다. 강씨의 사퇴 이유는 전혀 뜻밖의 것이다. 요약하면
유능한 사람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 주기 위해서 나 자신이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서"다.
강학중씨는 두형과 함께
1976년 대교를 출범시켰다. 이후 영업사원, 학습지 지도교사로서 발로 뛰며 회사를 일궈 나갔다. 이렇게 현장부터 출발해 간부 사원이 되고
1996년엔 대교 대표 이사 명패를 책상에 놓았다. 사장으로서 그는 무난히 업무를 수행했다. 회사도 성장을 거듭했다. 자신도 이를 인정한다.
강씨 는 스스로 생각해도 사장으로서 나는 아주 잘못한 것이 없이 원만히 일을 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에서 회사가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좀더 능력이 있는 사람, 이를테면 좀 더 냉정한 사람, 현실적인 사람, 손익 개념이 철저한 사람, 성취 지향적인 사람이 사장이
되어야 한다 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거리가 약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친형이 회장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장 자리에 앉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를 불편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것 있나 잘해오지 않았나라며 말렸지만 강씨는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부인도 당신은 유별난 것 같다며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건 제가 풀어야할 숙제지요. 프리미엄 없이 내 실력을 인정받고
싶거든요. 또 하나,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도전해 보고 싶었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었습니다." 부인은 퇴사하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잘 생각해 보라고 했을 뿐 적극적으로 말리지 는
않았다. 평소에는 유순하지만 결정적일 때 강 고집이 발동하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되는 딸 시내와 중학생이 되는 아들
바다는 의외로 변화된 상황을 쉽게 받아들였다. 엄마 에게서 아빠의 계획을 전해 듣고는 아빠가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셨듯이 아빠도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것이 좋겠다며 어른스럽게 받아들였다. 나중에 아빠가 사장님이 아니어도 좋으니 하고 싶은 일 하세요 라고 힘을 주기도 했다. 막상
아빠가 집에 있으니 백수 같아서, 이상하다며 잠시 머쓱해한다.
배 불러서 하는 짓 아니다.
강씨가 사장 자리에 물러나자 주변에서 진의를 의심하거나 배부른 짓쯤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
다시 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강씨는 고개를 흔든다. "퇴사한 후 대교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대교와 완전히 손을 끊을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은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저의 진심과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이런 편견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 회사를 떠나도 경제적으로 전혀 걱정할 게 없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한마디로 배불러서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강씨는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이 또래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쳐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나은 것도 없다는 것. 강씨의 재산은 아파트와 약간의 퇴직금이 고작이라고 한다. 대교의 주식 지분이 약간 있지만
상장되지 않았으니 당장 현금화할 수 가 없다. 강씨는 자신을 돌보는 기간을 향후 2년으로 잡고 있다. 2년간 월급이 들어올 데는 없다. 이
기간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46평형 아파트를 2억4천만원에 전세 놓고, 1억1천만원의 34평형 전세 아파트로 옮겼다. 차익으로 생긴
1억3천만원을 금융상품에 적립해 두고 이자로 생활비를 쓴다. 아파트를 줄인 또 다른 이유는 생활 거품을 줄이자는 것. 온 가족이 슴씀이를
줄였다. 우선 아파트 평형이 작아지자 관리비가 절반으로 줄었다. 내복을 입고 지내며 실내 온도를 낮춰 연료비를 줄였다. 경조사 부조금도 이제
사장이 아니니 형편껏 한다. 외식도 일반 대중 식당을 이용한다. 기름값을 아끼려 중형승용차를 소형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중고차 값이 턱없이 내려
그냥 타기로 했다. 대신 승용차 이용을 자제한다.
강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뭘 하고 지내나 앞으로 뭘 할 건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에 대해
현재로서 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고 답한다. 명확한 답변은 약2년 후 내년 말로 미룬다. 기자가 거듭해 서 계획을 묻자 강씨는 이렇게 운을
뗐다. "생각은 많습니다. 일례로 저는 가정 경영에 관심이 있어요. 회사에 적용하는 경영 마인드나 개념을 가정에도 접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할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인 시간을 어떻게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죠.
아이들과 가족에게 투자 하는 것이 확실한 투자라고 봅니다. 혹 기회가 되면 이런 쪽의 공부를 좀더 하거나 글을 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도
수시로 변하는 구상을 이야기하면 그 얘기가 살이 붙어 엉뚱한 데로 가기도 하지요, 나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년 연말에야 명확히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장을 그만 두고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많다. 괜찮은 연봉, 사장직책, 비서, 기사, 차량, 헬스 회원권등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준비한 것이고, 또 새로 얻을 것에 가치를 더 두기 때문에 큰 변화를 느끼지 않는다. 생활이 단순해진 것과,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 가장 큰 변화, 1월 한 달은 설 쇠는 것으로 끝났고 2월 한 달은 이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혼 생활
17년 동안 16번 이사를 했지만 강씨가 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앞만 보고, 일만 보고시속 1백km 속도로 달리다가 10km 속도로
줄이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중간에 잠시 길을 멈추고 논길도 둘러보고…여태껏 제가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이니까
아직까지는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 가족애 확인한 15일간의 도보 여행 강학중씨 가족은 최근 큰 일을 하나 해냈다. 서울에서 강원도
동해까지 2백80km를 도보로 횡단한 것이다. 새해1월2일 아침9시. 서울을 출발했다. 이날부터 이들 가족은 14박15일간 경기도 하남, 팔당,
양수리, 양평, 용문, 횡성, 새말, 안흥, 방림, 평창, 정선, 임계를 거쳐 동해까지 강행군 했다. 부인 조경희씨의 말. "온 가족이
새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아빠의 새출발, 고교입학을 앞둔 딸 시내,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 바다, 가족애도 함께 나누고요.
남편의 도보여행 제의에 그러자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두려웠습니다. 출발 며칠 전부터 잠을 잘 자지 못했어요. 마치 숙제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것 같은 찜찜한 상태였어요. 많이 아프면 안 갈 텐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국토를 종횡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시내는 엄마, 아빠는 조금 비현실적인 것 같다. 고교 입학 배치 고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라며 약간 탐탁치 않아
했다. 하지만 엄마에게서 여행 목적을 설명 듣고는 기꺼이 따랐다. 겨울 산은 위험하기 때문에 국도를 따라 걸었다. 하루 평균 도보 거리는
20km정도. 말이 20km이지 한겨울에 이 거리를 걷는 것은 고행이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한 국도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것은 위험하기도
했다. 강씨는 첫날 발을 삐끗했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침을 맞고 파스를 붙여 가며 강행군을 계속했다. 숙박한 한 민박집은 난방이 안 되는
바람에 온 가족이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왜 그 고생하나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중간에 만난 한 가게의 할머니는 차타고 가면 될 텐데 사서
고생하나"라며 혀를 쯧쯧 차시더군요. 하지만 따뜻한 인간미를 많이 느꼈습니다. 이 할머니는 우리를 나무라면서도 따뜻한 저녘밥이나 먹고 가라며
붙잡았어요. 침을 놓아준 한 한의사는 직업이 없다는 말을 듣고 침값도 받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에 출발할 때는 아이들이 가위춤을 추며
좋아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는 다리가 아프고 너무 힘이 들어 네 식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그러는 중에도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핸드폰과 삐삐였다. 친지, 친구들은 이들을 격려하는 전화를 수시로 하고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다. 이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새로운 힘을
북돋워 줬다. 형님인 강영중 회장은 두 번이나 승용차를 몰고 찾아와 고기를 사 주며 응원했다. 14박15일간 쓴 총경비는 1백50만원. 하루
10만원 꼴이었다. 여관 숙박비가 하루 3만~4만원으로 가장 컸다. 식사는 빵이나 초코파이로 때우기도 했으나 1인1끼에 평균4천원을 잡았다.
예상치도 않게 파스 값과 침값으로 적잖은 돈이 들었는데, 강씨가 발목을 삐지 않았다면 여행 경비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전에도 낭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관이나 여인숙을 고를 때도 꼭 세 군데를 보고 싼 데서 잤습니다. 식사 때도 음식점 주인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2인분만 시켜 공기밥을 추가 해 네 사람이 먹었어요. 돈을 아끼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절약의 미덕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더
컸습니다." 하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경리부장을 맡은 딸 시내가 어찌나 알뜰한지, 강씨가 막걸리 한 병과 쥐포 다섯 마리를 1천8백원에
사 왔더니 아빠, 막걸리는 마셔도되고 안 마셔도 되는 걸 왜 돈 쓰냐고 따졌다. 율무차 한 잔 사 먹자고 통사정을 해도 알뜰 경리부장의 금고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1월6일 드디어 종착지인 동해역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은 온 가족이 약속이나 한 듯 동해역이다 라고 환호했다. 그것은
우리는 해냈다 는 탄성이었다. 조경희씨는 이 여행은 고생되었지만 감동적 이었다고 함축했다. "보름동안 한 방에서 먹고 자니 가족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빠가 삔 곳에 물파스를 문지르고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자 아이들이 이 좁은 방에서 너무 하시지 않냐며 코를 잡았어요,
그러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어려운 목표를 함께 정하고 해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감동했어요. 찡한 가족 애도 다시 한 번 확인했고요."
도보여행은 강씨의 퇴사와 함께 아이들에게 아빠의 소중함을 심는 계기도 됐다. 아이들은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세심한 신경을 쓴다.
며칠 전엔 집에서 햄버거를 만들었는데 아들 바다는 가장 큰 거 아빠드리세요. 집에 계시는데 용기를 가지시게요 라고 말해 엄마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리고 아빠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딩동하고 벨을 누르면 그야말로 총알처럼 뛰어나간다.
강학중씨는 이제부터 좀더 차분하게
지내며 본격적으로 자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잘 사는 방식도 여러 가지일 것 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장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저는 돈, 직책, 권위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떠났을 뿐입니다. 저는 제게
맞는 삶을 찾으려는 것뿐입니다. 저의 지금 결정이 잘못되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의 건강에 문제가 없고, 엄마. 아빠 사이에 문제가 없다면 정말 아빠는 겁나는 게 없다고요. 이 외에는 다 감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불혹의 나이 마흔에 불혹의 나를 찾아나선 강학중씨, 그는 배부른사람인가, 마음부른
사람인가. [출처] 97년 3월호 F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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