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든 여자."
내 나이 서른아홉. 어느덧 불혹이라는 나이에 성큼 다가서 있다. 내게는 서른넷 된
아내와 다섯 살바기 딸아이가 하나 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다.
이름 하여 househusband, 즉 남자 전업주부가 나의 직업이다.
내가 househusband가 된 까닭은 간단하다. 맞벌이부부로 생활하던 중 아이가 생겼고,
출산을 앞둔 아내는 직장생활을 계속 희망했다. 그래서 내가 육아와 살림을 담당하기로
했다. 지난 10년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 보더라도 아니, 전업주부생활 5년만 되돌아
보더라도 그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는 여느 집 아이와 다른 게 참 많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는 것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엄마아빠와 함께 있어도 늘
아빠인 나하고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퇴근한 아내가 책을 보는 것은 용납이 돼도
내가 보는 것은 안 된다. 휴일에 아내가 늦잠을 자는 것은 괜찮아도 내가 늦잠을 자는
것은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저하고 놀아줘야 하니까. 끝으로 제 몸이 아프면 엄마
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밤새도록 내게 매달린다는 사실이다. 칭얼대는 아이를
안아주다가 팔이 떨어질 것 같으면 업어주고, 업어주다가 다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으면 안아주기를 반복하면서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내가 아이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만큼 아내보다 아이와 친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그런 징조는
아내를 처음 만난 12년 전에도 감지되었으니까. 꿈결 같았던 연애시절, 서너 달 동안
내가 아내로부터 들었던 말은 단 세 마디뿐이었다. ‘예’, ‘아니요’, ‘아무거나’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우선권을 주어도 늘 ‘예’, ‘아니요’였고, 어쩌다가 한 번 맛있는 걸 사주고
싶어서 의견을 물어보아도 ‘아무거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 느꼈던 답답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죽하면 다섯 살이나 많은 내가 아내 앞에서 수다를 떨고
재롱을 부리면서 살겠는가?
신혼에는 물론 지금도 아내가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정희씨, 재료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요!” 이런 말을 듣는 아내의 기분이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재료를 사용해서 음식을 만들어도 그것을 만지는 사람에
따라 천지차이의 맛이 난다. 아내는 요리책을 펼쳐놓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맛을 내는 재주는 없다. 결정적으로 아내에겐 살가운 맛이 없다. 다정다감함이 없다는
것이다. 10년을 함께 살아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한다. 지난 12년 동안
자신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주어도 내 생일 한 번 제대로 챙기질 못한다. 그런 모습은
아이한테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회사 일을 마치고 현관문으로 들어서는 아내. 아이는 그런 엄마에게 매달리고 안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 지청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내의 행동은 늘 똑같다. “다향아,
잠깐만”이라는 말을 남기고 건넌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세면을 마친 뒤에야 아이를 부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엄마에 대한 아이의 반가움이
대부분 사라진 뒤다.
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이토록 적나라하게 아내의 흉을 보아도 되는
건가? 아마도 내일모레 40대로의 진입을 앞둔 착잡함, 그에 대한 자성(自省). 그리고
결혼생활 10년차의 권태기(?) 뭐 그런 비슷한 감정에서 이렇듯 두서없이 떠들어 대는
것이나 아닌지.
올 초에 이사를 했다. 창문 너머로 관악산이 빼곡히 들어서고, 그 창문 아래로 관악산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전망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비록 낡고 작은 아파트지만 나는
그 집에 ‘다락방(茶樂房)’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웬만한 콘도가 부럽지 않은 전망을 가진
곳, 그곳에는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다락방으로 이사를 하면서 이상한 일이 하나 생겼다. 누군가가 우리 우편함에 잡지를
꽂아놓는 것이었다. 우체국을 통하지 않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나흘쯤 지난
잡지가 꽂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구독하는 잡지를 읽은 다음 우리
우편함에 꽂아놓는 듯 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정희씨, 누군가 보기에 내가 세상일에 너무 무관심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아내가 말한다. “누가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뭔 소릴 그렇게
해요?” 고정관념은 무섭다. 우리 우편물에 꽂혀져 있는 잡지는 시사종합지였고, 그런
것은 의례 남자들이 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누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와 함께 놀러나가다가
우편함에 꽂혀있는 잡지를 보았다. ‘이번 주의 제호(題號)는 무얼까?’궁금해서 잡지를
뽑아드는데 무언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꽃을 든 남자’라는 예쁜 이름의 화장품이었는데
남성용 세안제였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남자한테 화장품을 선물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여자의 소행일 것이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더더군다나 세안제는 지성용이었다. 세수를 하고 나도 곧 번들번들해지는
내 피부에 적합한 것이었으니 심장이 두근거릴 수밖에……. 아내 아닌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잠자던 세포 하나하나가 활짝 기지개를 켜고, 구름
한 점,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 막 벌어지기 시작한 꽃봉오리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고목생화(枯木生花)란 이를 두고 이름일 것이다.
갑자기 생활이 윤택해졌다. 툭하면 세안제를 사용하면서 누가 주었을까를 고민하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안제를 발견한 아내가 묻는다. “이거 웬
거예요? 샀어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바람에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던 비밀은
깨지고, 사실대로 털어 놓아야 했다. 그리고 괜히 민망해져서 겨우 한마디 했다.
“봐요, 정희씨! 나도 아직 다른 여자들한테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좀 (애정을
갖고) 잘해봐.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뾰로통해진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좋겠네!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겨서 정말 좋겠어.” 그런 아내를 보면서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기분이 썩 좋았다. 결혼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겪는 아내의 질투였으니까. “요즘 피부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에요? 평생 로션 한 번
바르지 않던 사람이.” 그랬다. 나는 얼굴에 무얼 바르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자외선지수가 높던 말든 메마른 날에 얼굴에 버짐이 피거나 말거나 웬만하면 그냥 지낸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남성용 세안제를 쓰고, 천연 화장수를 바르고 하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도 응수를 한다. “그럼,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어떡해요? 그리고 한 번 만져 봐요. 예전에 비해 지금 피부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심드렁해진 아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 늦은 밤, 스탠드 하나를 밝혀놓고 책을 보는데 아내의 수첩이 눈에
띈다. 아내는 자신의 수첩에다 간단한 일기를 적는다. 그리고 그것을 훔쳐보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아내는 질색을 하지만 나쁜 의미에서 일기를 훔쳐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아내를 보다 더 잘 배려하기 위해 늘 노력하는 사람인데 일기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망막이 화등잔 만해질 내용이 들어온다. ‘성근, 세안제
8,000원’ 순간적으로 머리가 휑해진다. ‘아니, 이게 뭐야?’ ‘이 사람이 나를 가지고 논 거야?,
뭐야?’ 당장이라도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 수는 없는 법! 꾹
참고 새벽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상을 차려놓고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 겨우 겨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내에게 다짜고짜 수첩을 들이밀면서 물었다.
“정희씨, 이게 뭐야?” 아내가 졸린 눈을 부비면서 짜증 기 있는 목소리로 묻는다.
“뭐?” “이거 말야? 세안제 8,000원. 당신이 주인공이었어?”
아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그럼, 나 말고 당신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는 줄 알았어?”
아내의 말을 듣고 허허로운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아니, 화장품을 사주려면 그냥 사주지 왜 쇼를 하고 그래?”
“성근씨! 당신은 화장품 바르는 걸 싫어하잖아? 그런데 세안제를 쓰겠어? 비누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고 당신 요 몇 년 사이에 부쩍 나이 들어 보여. 피부도 예전 같지 않고.”
“……” “그리고 당신 지난 며칠동안 행복했잖아? 그런 당신을 지켜보는 나도 행복했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늘
무뚝뚝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에게 이런 세심함과 지혜가 숨겨져 있었다니.
나는 아내를 꼭 껴안으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겨우 한 마디 했다. “정희씨, 사랑해!” <2003, 봄>
* 다가오는 11월 28일이면 결혼 21주년입니다. 살다가 지루해지면 리마인드 결혼식을
올리자고약속했는데 아직 실천하지 못했네요. 착실히 준비해서 은혼식 때는 그것을
실천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