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어느 날 한 아이가 낡은 책갈피 속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성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 아기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이는 세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고고학자를 찾아간다. 그리하여 고고학자로부터 그게 가족사진이란 걸 알게 된다.
<살아 있는 고전문학 교과서> 중 ‘가족에 숨겨진 비밀’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족이란 제도가 사라져 버린 시대를 가정한다. 아이는 공장에서 인공수정으로 대신한다. 공상과학에나 등장할 법한 설정이지만,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흔들리는 시대에 마냥 웃어넘길 얘기는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행복한가.
국민 2명 중 1명, 가족 위기
#1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에 따르면 15~49세 기혼 여성(1만1161명)의 84.8%는 향후 출산 계획이 없다.
#2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올 1월 조사에 의하면 서울 미혼 여성 가운데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견은 2.9%에 불과했고, “결혼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66.7%)는 응답이 다수였다.
#3 통계청의 ‘2018년 혼인·이혼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이혼은 10만8700건으로 전년보다 2.5%(2700건) 늘었다. 특히 동거 기간 20년 이상 이혼이 9.7%, 30년 이상은 17.3% 증가하는 등 황혼 이혼이 크게 늘고 있다.
‘행복의 보금자리’ 가정에 대한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거나, 이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가족의 형태도 전환되고 있다. 과거 3세대가 모여 사는 친족 중심의 가족이 소규모 핵가족으로 전환됐고, 최근에는 그 핵가족마저 비혼, 한 부모 가정, 조손(祖孫) 가정 등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
문제는 가족 공동체 지표가 뒷걸음치고 있다는 것.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삶의 질 영역별 종합지수’ 결과를 보면, 안전(128.9)과 교육(120.6), 소득 소비(118.1) 영역은 개선되고 있지만, 유독 가족 공동체(97.8) 분야는 저조했다. 이 지표는 2006년 삶의 질 수준을 100으로 삼은 것으로, 가족 공동체 부문은 오히려 10년 전보다 퇴보한 셈이다.
국민 2명 중 1명이 ‘위기’를 겪었다는 조사도 나왔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사회환경 변화에 따른 가족 위기 특성과 정책 과제’ 보고서(2017년)에서 20~64세 1500명을 조사한 결과 691명(46.1%)이 가족 위기를 겪었다는 결과를 소개했다. 가족 위기란 가계 파산, 구성원의 자살, 재난 등 삶을 위협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없어 무력한 상태를 말한다.
가족의 위기 기간도 평균 6년이나 됐다. 더 심각한 것은 ‘가족 안에 의존할 사람이 없다’(32.7%)는 것. 물적 자원이 부족(30.7%)하고 어디에 도움을 요청(30.7%)해야 할지도 몰랐다. 가정 곳곳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도움을 구할 곳조차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가족 위기의 원인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많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경제적 위기가 61.6%로 가장 많았고, 가족관계 위기 34.5%, 자녀 돌봄이나 노부모 부양 위기가 30.8%였다.
저성장 시대 경고음, ‘가족 기능 과부하’
김승우(55, 가명) 씨는 재작년 은퇴를 한 뒤에도 가족 부양의 짐을 내려놓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다. 자녀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난으로 아르바이트 중이다. 치매 증상을 보이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것도 그의 몫이다. 공무원인 아내는 지방에서 근무 중이어서 주말 부부로 지낸다. 김 씨는 “다행히 은퇴 후 다시 직장을 갖게 됐지만, 노후 준비는커녕 노모와 아이들 뒷바라지에 하루하루 허덕인다”고 말했다.
‘낀 세대’인 중·장년층의 현주소다. 소중한 가족으로 인해 과중한 삶의 무게를 느끼는 이들이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중·장년층 가족의 이중 부양 부담 구조 변화와 대응 방안 연구’에 따르면, 노부모의 중장년층 자녀에 대한 경제적 의존 수준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노부모 부양가족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 지원은 연말정산 소득공제,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재, 주택 특별공급 등에 불과하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복지 국가들은 노인을 돌보는 가족 돌봄자에게 돌봄자 수당이나 간병 수당의 형태로 경제적 부담을 완화해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관계자는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중·장년층 가족의 지속적인 이중 부양 부담 구조는 빈곤과 해체를 야기해 많은 사회적 비용 부담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급격한 가족 형태와 가치의 변화 원인을 ‘가족 기능 과부하’에서 찾는다. 국가와 사회가 떠민 복지를 가족이 해결하는 구조에서 가족의 위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미혼화·만혼화 경향은 이미 20년 전 일본이 장기 불황에 진입하며 겪었던 일들이기도 하다. 일본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는 저서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에서 “가족의 변화를 단순히 ‘개인주의의 증가’나 ‘사회적 도덕성의 상실’로 보기보다 경제적 변동과 연계해봐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가족이었다. 국가의 복지 지원이 미약한 상태에서 가족들 안에서 출산과 양육, 부양을 해결해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러한 가족 체계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용 불안의 상시화로 각자도생의 단위는 가족이 아닌 ‘개인’으로 변화됐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경제적 부담을 지고 가장의 역할을 하며, 어머니는 돌봄의 역할을 맡는 기존의 구조가 지탱하기 어려워졌다는 것. 생활고 탓에 맞벌이에 뛰어드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공동체인 가족에서 돌봄 기능은 약화됐다. 가족 간 정서적 거리도 멀어졌다. 가족 문화와 가치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정재훈 교수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떠나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의 재구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구처럼 비혼 출산, 비혈연 가족 등 다양한 관계에 열린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작지만, 더 긴밀한 가족으로
우리가 재구성하고픈 가족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30년 가족 시나리오’에 따르면 응답자의 44.8%가 ‘느슨하지만, 친밀한 가족’을 선호했다. 국가가 아동·노인에 대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부양 부담은 느슨하고, 정서적으로는 친밀한 형태다. 국가와 사회가 양육, 부양 등의 부담을 나눠 가족들이 친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바람이다.
요즘은 ‘작은 가족’이 대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국의 평균 가구원 수는 2.5명이다. 2045년에는 2.1명으로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주목할 점은 가족원 수가 줄어들면서 가족 갈등의 양상은 오히려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가족 수가 줄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고 했다. 과거 형과 다툼이 있을 때 누나가 도움을 주는 식으로 갈등을 푼다거나, 부부가 자녀를 보고 화해를 한다거나 했다면, 요즘 가족들은 중재자 없이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는 공감-인정경청이 필요하다. 김 원장은 “자칫 대화를 하려다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한 다음에 뜻을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은 “가족 간 거리를 좁혀 가기 위해서 우선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만들라”고 했다. 예컨대 아이들이 좋아하는 콘서트에 함께 가는 경험으로,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네. 다음에도 함께’같이 심리적 거리를 좁혀 가라는 조언이다. 가족 중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그가 원하는 시간, 장소 등에 맞춰보라고 했다. 그가 수많은 가정을 상담하면서 발견한 행복한 가정들은 구성원 간 대화가 원활하고 시간을 공유하는 데 의미를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행복한 가족의 7가지 공통점
매일매일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다.
문제 해결 능력이 있다.
대화를 많이 하고 말이 통한다.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
서로에게 헌신한다.
가족 공동의 가치관이 있다.
웃음이 넘친다.
자료: <가족수업>(김영사)
[출처] 한경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