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도 즐거워야 할 명절. 밥상머리에 앉아 단란한 가족애를 확인해야 할 명절. 그렇지만 매번 즐거운 것은 아니다. 시댁 가는 문제로 다툼이 있을 수 있고,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재산문제가 불거질 수 있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조카를 타박하다가 말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즐거운 명절’이 ‘다툼의 명절’로 바뀔 수 있다.
사소한 다툼을 벗어나 극단적인 비극이 초래될 수도 있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던 A(32) 씨는 지난해 10월 초께 경찰에 붙잡혔다. A 씨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던 지난해 9월 22일 경기 고양시 자신의 집에서 말다툼 끝에 아내 B(38) 씨를 목 졸라 살해했다. A 씨는 경찰조사에서 “무직 상태인 나에게 아내는 막말을 퍼붓고 무시하는 처사를 해 화가 나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설을 몇 시간 앞두고 있던 지난해 2월 9일 밤 9시40분께 경북 군위군에서는 형을 살해하려 한 혐의로 C(48) 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C 씨는 설 연휴를 맞아 어머니가 사는 집에 왔다가 형과 재산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끔찍한 폭력과 살인을 불러오는, 있어서는 안 될 가족 불화가 명절에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경찰에 접수된 가정폭력 신고건수는 평소보다 30~50%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추석 전날인 지난해 9월 18일 하루 동안 서울지방경찰청 112신고센터에 접수된 가정폭력 신고는 모두 153건이었다. 19일에는 151건, 20일 133건, 21일 157건이었다. 평소 100건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가정폭력 신고가 추석 연휴기간에 몰린 것이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은 “명절에 가족이 모여 다투는 경우가 많은 데 평소에 쌓아뒀던 갈등이 사소한 말에도 자극받아 폭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옥희 한국가족사랑연구원 원장은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지지 못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근에는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대학생들이 받는 명절 스트레스가 가정불화의 주원인이 되기도 한다. 실제 대학생 10명 중 6명이 명절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아르바이트 구인구직업체 알바몬이 최근 대학생 7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명절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겪고 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1%가 ‘그렇다’고 답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설 명절을 맞이해 재미있는 문자를 보내왔다. “올 설에는 가까운 사이라도 직장, 진학, 혼인문제는 묻지 말아주세요. 소통은 상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관심이 ‘개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선의(善意)가 다툼의 소지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족이라도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이해와 격려를 바탕으로 한 진정성 있는 ‘사랑의 제스처’를 보내는 것이 즐거운 명절의 전제조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김 원장은 “평소 가족ㆍ친지간에 별다른 소통이 없다보니 ‘취직을 했냐’는 말 한마디에도 대학생들은 상처를 입고, 부담과 압박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며 “평상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마음의 앙금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가족 간에도 말 못할 얘기가 있다는 게 서글프다는 평가도 있을 수 있지만, 평소 소통이 활발하지 않았다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조심하면서 넓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세상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
[출처] 헤럴드경제 2014.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