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 중에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지만 강학중
한국가정경영연구소 소장(47)의 경우는 ‘재벌사장도 저 싫으면 그만’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그가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 대교의 대표이사를 지내다가 사표를 던지고
연구소를 설립한 것이 지난 2000년의 일. 두 형과 함께 맨손으로 대교를 창업했던
그가 훌쩍 회사를 떠난 이유는 ‘가정과 일의 균형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가정’이라니.
“처음 연구소를 낼 때는 수지타산이 맞겠느냐, 차라리 재테크연구소를 차리라 는
반응이 많았어요. 하지만 남녀가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저절로
가정이 굴러가는 게 아니거든요. 가정도 기업처럼 체계적이 고 합리적으로
경영하고,거름주고 잡초를 뽑는 정성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이제 연구소를 오픈한지 3년 남짓 되지만 그는 매일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있다. 연구소는 예약없이 상담받기 힘들 정도로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고, 지방에서는 강연요청이 쇄도한다. 가정문제 에 대한 인식변화를 반영하듯
그가 강의하는 경희대 ‘결혼과 가족’ 수업은 캠퍼스 커플들은 물론 1학년 학생까지 몰려와
붐빈다.
“그래도 사실 우리 집도 다른 집과 별 차이가 없어요. 다만 강의하면서 찔리지
않도록 가족에게 더 잘 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다보니 조금은 낫다고 할 수 있죠.
자식 교육도 우리 아이들은 아직 진행형이고, 정말 성공한 것은 우리 어머니세요.”
MBA 출신 인 강 소장은 어머니 김정임(82)씨를 ‘투자종목을 잘 잡은 성공한 사업가’로 표현한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자녀 뒷바라지에 헌신했던 김씨는 맏이 영중씨를 대교 그룹 회장으로, 둘째 경중씨를 인쇄·출판그룹 ‘타라’의 회장으로, 그리고 막내 강 소장을 손꼽히는 가족 문제 전문가로 키웠다.
자녀교육이라 는 투자종목을 잘 고른 혜안이 있었고, 남편을 설득해 고향 진주를 떠나 아이들을 서울 학교에 넣을 만큼
결단력이 있었으며, 남편과 사별 후에도 억척스레 하숙을 치며 학비를 댈 정도로 목표로 삼은 것을 끝까지 놓지 않는 끈기가 있었기에 이룬 결과다.
“제가 가정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부 모님이 남달리 우애와 효도를 강조하신 영향이었어요.
대교의 사시도 ‘건강한 가정’이라고 지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역시 가 족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변화의 계기는 아이들에게 아빠한테 불만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시내(21)씨와 바다(18)군 남매가 동시 에 “저녁밥 좀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을 때였다. 그 때부터 일주일에 네번씩 가족과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고, 일단 원칙을 세우자 외부 약속을 조정하는 요령도 생겼다.
“한국 아빠들의 문제는 너무 바쁘다는 겁니다. 같이 식사하고 TV도 보면서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군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 아이에 대해 알고 있어야 대화할 거리도 생기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반드시 따로 만들어야 해요.”
그는 가족과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1998년 서울에서 동해까지 14박15일의 가족 도보여행을 떠났다. 처음으로 가족과 꼬박 보름을 함께 하는 동안 그는 미처 몰랐던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간에 그가 발목을 삐어 힘들어 하자 아빠 몰래 배낭 짐을 덜어간 아이들에게서 가슴 뭉클한 사랑을 확인하기도 했다.
“저는 강의할 때마다 자식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된다고 강조해요. 저도 아마 조금만 늦었으면 가족 속에 다시 자리 잡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이미 때를 놓쳤다면 인내를 가지고 벽을 허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말을 걸 때는 대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특히 잔소리를 할 때이지 아이들의 관심사나 고민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 핸드폰을 바꾸고 싶어 하는지, 왜 염색하고 싶어 하는지 일단은 귀담아 들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이면 아이도 다가오게 마련이고, 함께 대안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는 ‘좋은 남편 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는데요, 좋은 부부가 있어야 좋은 가정도 있기 때문이죠. 부부가 화목해야 그 에너지로 아이를 돌볼 수 있고, 서로 사랑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지요.”
아이들에 대한 ‘비현실적 인’ 기대를 버리라는 것도 그가 빼놓지 않는 충고다. 아이를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기대가 크면 클수록 아이와 불화하고 갈등하게 되기 때문이다. 강 소장도 고등학교 때 명문대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에 짓눌린 나머지 가출을 감행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 영국 런던시립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딸 시내씨는 한 번도 공부 때문에 속을 썩인 적이 없지만 고3인 바다군은 공부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공부 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아들이기에 그도 구태여 공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아내에게 아이들이 자랄수록 실망하는 연습, 배신당하는 준비를 하자고 했어요. 아이들한테는 늘 너희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제가 회사를 그 만두겠다고 했을 때 ‘사장 딸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아빠도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라며 힘을 실어주더군요.”
인터뷰용 사진 촬영을 하면서 사진기자가 강 소장에게 표정이 너무 좋다는 인사를 건넸다. 강 소장은 선뜻 “행복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엊저녁에 아들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빠는 언제 제일 행복했냐고 물어요. 그래서 바로 지금이라고 했지요. 일찍 가정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마침 그 일이 적성에도 맞고 가치도 있죠. 또 사랑하는 가족들이 건강하니 하루 하루가 기쁠 수 밖에요.”
중년남성에게 서 보기 힘든, 억지로는 절대 지어낼 수 없는 그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과연 ‘가정이 지상의 천국’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권혜숙기자 hskwon@kmib.co.kr